회남자 08 본경훈(本經訓)

회남자(淮南子) · 전한 유안 · 번역·감수 허유

「본경(本經)」은 도덕의 근본 줄기[本經]를 논한다는 뜻이다. 태고의 순박한 다스림에서 인의예악(仁義禮樂)이 차례로 생겨난 쇠퇴의 과정을 밝히고, 제(帝)는 태일(太一)을, 왕(王)은 음양을, 패(霸)는 사시를, 군(君)은 육률(六律)을 본받는다는 통치의 위계를 제시하며, 다섯 가지 방탕[五遁]이 천하를 망친다고 경계한다.

핵심 구절 — 원문과 번역

由此觀之,天地宇宙,一人之身也;六合之內,一人之制也。

이로써 본다면, 천지 우주는 한 사람의 몸이요, 육합의 안은 한 사람이 다스리는 바이다.

帝者,體太一;王者,法陰陽;霸者,則四時,君者,用六律。

제는 태일을 체득하고, 왕은 음양을 본받으며, 패는 사시를 본받고, 군은 육률을 쓴다.

夫天地之生財也,本不過五。聖人節五行,則治不荒。

무릇 천지가 재물을 낳음은 본디 다섯(오행)에 지나지 않으니, 성인이 오행을 절제하면 다스림이 황폐하지 않는다.

必有其質,乃為之文。

반드시 그 본질이 있어야 비로소 그것을 꾸민다.

번역

태청의 시초와 쇠퇴의 과정

태청(太淸)의 시초에는 화순하여 적막하고, 질박하고 참되어 소박하며, 한가하고 고요하여 조급하지 않고, 옮겨가되 까닭이 없어, 안에 있으면 도에 합하고 밖에 나오면 의에 맞으며, 움직이면 문채를 이루고 행하면 사물에 편리하였다. 이때는 날과 때를 가리지 않고 점괘를 치지 않으며, 시작을 도모하지 않고 끝을 의논하지 않아, 천지에 두루 통하고 음양에 정(精)을 같이하며 사시에 화합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이 덕으로 덮고 땅이 즐거움으로 실으며, 사시가 그 차례를 잃지 않고 비바람이 그 사나움을 내리지 않으며, 해와 달이 맑게 빛을 떨치고 오성이 궤도를 따라 그 운행을 잃지 않았다.

쇠퇴한 세상에 이르러 산의 돌을 쪼고 금과 옥을 캐며, 조개를 따고 구리와 쇠를 녹이니 만물이 불어나지 못하였다. 태(胎)를 가르고 어린것을 죽이니 기린이 노닐지 않고, 둥지를 엎고 알을 깨뜨리니 봉황이 날지 않았다. 부싯돌을 비벼 불을 취하고 나무를 얽어 누대를 만들며, 숲을 태워 사냥하고 못을 말려 고기를 잡았다. 흙을 쌓아 언덕에 살고 밭에 거름을 주어 곡식을 심으며, 땅을 파 우물을 마시고 내를 트게 하여 이로움을 삼으며, 성을 쌓아 견고함을 삼고 짐승을 잡아 가축으로 삼으니, 음양이 어긋나고 사시가 차례를 잃어 우레가 부서뜨리고 우박이 사납게 내리며, 안개와 서리와 눈이 개지 않아 만물이 시들어 죽었다. 천지의 화합과 음양의 도야로 만물을 빚는 것은 모두 사람의 기운을 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아래의 마음이 떠나면 기운이 위로 찌고, 임금과 신하가 화목하지 못하면 오곡이 영글지 않는다.

이로써 본다면, 천지 우주는 한 사람의 몸이요, 육합(六合)의 안은 한 사람이 다스리는 바이다. 그러므로 본성에 밝은 자는 천지가 위협할 수 없고, 부험(符驗)을 살피는 자는 괴이한 사물이 미혹할 수 없다. 옛사람은 천지와 기운을 같이하여 한 세상과 더불어 한가로이 노닐었다. 이때는 경하의 이익도 형벌의 위엄도 없고, 예의와 염치를 베풀지 않으며 비방과 칭찬, 어짊과 비루함을 세우지 않아도, 만민이 서로 침범하고 속이며 사납게 굴지 않으니, 오히려 혼명(混冥) 가운데 있었다.

쇠퇴한 세상에 이르러 사람은 많고 재물은 적어 일에 힘써도 봉양이 부족하니, 이에 다툼이 생겨 어짊[仁]을 귀히 여겼다. 어짊과 비루함이 가지런하지 못하고 패거리가 짓고 속임수를 베풀며 교묘한 기심(機心)을 품어 본성을 잃으니, 이에 의(義)를 귀히 여겼다. 음양의 정으로 혈기의 감응이 있지 않음이 없는데, 남녀가 무리지어 섞여 살아 구별이 없으니, 이에 예(禮)를 귀히 여겼다. 성명(性命)의 정이 음란하여 서로 핍박하여 부득이하면 화합하지 못하니, 이에 악(樂)을 귀히 여겼다. 그러므로 인의예악은 폐단을 구할 수 있으나 두루 다스리는 지극함은 아니다. 무릇 어짊은 다툼을 구하는 것이요, 의는 잃음을 구하는 것이며, 예는 음란을 구하는 것이요, 악은 근심을 구하는 것이다. 신명이 천하에 정해지면 마음이 그 처음으로 돌아가고, 마음이 그 처음으로 돌아가면 백성의 마음이 선해진다. 그러므로 덕이 쇠한 뒤에 어짊이 생기고, 행실이 막힌 뒤에 의가 서며, 화합이 사라진 뒤에 소리가 고르고, 예가 음란해진 뒤에 용모를 꾸민다.

사물의 헤아릴 수 있음과 없음, 천부(天府)

천지의 큼은 곱자와 푯대로 알 수 있고, 별과 달의 운행은 역법으로 추산하여 얻을 수 있으며, 우레 소리는 북과 종으로 본뜰 수 있고, 비바람의 변화는 음률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큰 것은 천지도 담을 수 없고, 지극히 미세한 것은 신명도 거느릴 수 없다. 율력을 세우고 다섯 색을 구별하며 청탁을 다르게 하고 단것과 쓴것을 맛보는 데 이르면, 소박함이 흩어져 그릇이 된다. 인의를 세우고 예악을 닦으면 덕이 옮겨가 거짓이 된다.

옛날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들자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내리고 귀신이 밤에 울었으며, 백익(伯益)이 우물을 만들자 용이 검은 구름으로 오르고 신이 곤륜에 깃들었으니, 능함이 많을수록 덕이 엷어졌다. 그러므로 주(周)나라 솥에 수(倕)를 새기되 그 손가락을 깨물게 하여 큰 재주를 부려서는 안 됨을 밝혔다. 말 없는 변론과 도 없는 도가 통하는 듯하면 이를 천부(天府)라 하니, 취해도 줄지 않고 따라도 마르지 않아 그 나오는 곳을 알 수 없으니, 이를 요광(瑤光)이라 한다.

옛날 용성씨(容成氏) 때는 길에서 기러기처럼 줄지어 다니고, 갓난아이를 둥지 위에 맡기고 남은 곡식을 밭머리에 두며, 범과 표범의 꼬리를 잡고 살무사와 뱀을 밟아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요(堯) 때에 이르러 열 개의 해가 함께 나와 벼를 태우고 초목을 죽여 백성이 먹을 것이 없었다. 알유(猰貐)·착치(鑿齒)·구영(九嬰)·대풍(大風)·봉희(封豨)·수사(修蛇)가 모두 백성의 해가 되니, 요가 예(羿)를 시켜 착치를 주화(疇華)의 들에서 베고, 구영을 흉수(凶水)에서 죽이며, 대풍을 청구(靑丘)의 못에서 주살하고, 위로 열 개의 해를 쏘고 아래로 알유를 죽이며, 수사를 동정에서 끊고 봉희를 상림에서 사로잡으니, 만민이 모두 기뻐 요를 천자로 세웠다.

성인과 현자의 이름을 가진 자는 반드시 난세의 환난을 만난 것이다. 지금 지인이 난세 가운데 나서 덕을 머금고 도를 품으며 끝없는 지혜를 가지고도 입을 다물고 말을 그쳐, 마침내 말하지 않고 죽은 자가 많으나, 천하가 그 말하지 않음을 귀히 여길 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항상한 도가 아니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항상한 이름이 아니다." 대나무와 비단에 적고 쇠와 돌에 새겨 남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그 거친 것이다.

제·왕·패·군의 위계

제(帝)는 태일(太一)을 체득하고, 왕(王)은 음양을 본받으며, 패(霸)는 사시를 본받고, 군(君)은 육률(六律)을 쓴다. 태일을 잡는 자는 천지를 우리에 가두고 산천을 누르며, 음양을 머금고 토하며 사시를 끌고, 팔극을 벼리하고 육합을 경위하여, 덮고 적시고 비추고 인도하되 두루 사사로움이 없으니, 날고 꿈틀거리는 것이 그 덕을 우러러 살지 않음이 없다. 음양이란 천지의 조화를 이어받아 만 가지 형체를 이루고 기운을 머금어 사물을 변화시켜 부류를 이루니, 줄고 늘고 말고 펴며 헤아릴 수 없는 데 잠긴다. 사시란 봄에 낳고 여름에 기르며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여, 취하고 줌에 절도가 있고 나가고 들어옴에 때가 있다. 육률이란 살림과 죽임, 상과 벌, 줌과 빼앗음이니, 이것 없이는 도가 없다.

제(帝)가 음양을 체득하면 침해받고, 왕(王)이 사시를 본받으면 깎이며, 패(霸)가 육률을 절제하면 욕되고, 군(君)이 준승(準繩)을 잃으면 폐한다. 그러므로 작으면서 큰 것을 행하면 넘쳐서 친하지 못하고, 크면서 작은 것을 행하면 좁아서 용납하지 못한다. 하늘은 그 정(精)을 아끼고, 땅은 그 평(平)을 아끼며, 사람은 그 정(情)을 아낀다. 하늘의 정은 해·달·별·우레·번개·비바람이요, 땅의 평은 물·불·쇠·나무·흙이며, 사람의 정은 사려와 총명과 희로이다. 그러므로 네 관문[四關]을 닫고 다섯 도망[五遁]을 그치게 하면 도와 하나가 된다.

다섯 가지 방탕[五遁]

무릇 어지러움이 생겨나는 까닭은 모두 흘러 방탕함[流遁]에 있다. 흘러 방탕함이 생겨나는 것이 다섯이다. 크게 가구(架構)를 짓고 궁실을 일으키며 누각과 잔도를 늘이고 나무를 정교하게 꾸미는 것, 이는 나무에 방탕함[遁於木]이다. 더러운 못을 깊이 파고 물길을 멀리 끌며 굽은 언덕을 꾸미고 격한 물결을 일으키며 연꽃을 심어 자라와 물고기를 기르고 용 모양 배를 띄워 즐기는 것, 이는 물에 방탕함[遁于水]이다. 성곽을 높이 쌓고 험한 곳을 세우며 누대와 정자를 높이고 동산을 사치스럽게 하며 흙을 쌓아 산을 만드는 것, 이는 흙에 방탕함[遁於土]이다. 큰 종과 솥, 아름다운 중기(重器)를 만들고 화려한 무늬를 새겨 서로 얽고 빛나게 하는 것, 이는 쇠에 방탕함[遁于金]이다. 삶고 굽고 지져 맛을 조화시켜 형(荊)·오(吳)의 달고 신 변화를 다하며, 숲을 태워 사냥하고 큰 나무를 불사르며 풀무를 불어 구리와 쇠를 녹이는 것, 이는 불에 방탕함[遁於火]이다. 이 다섯은 하나만으로도 천하를 망치기에 족하다.

무릇 소리와 색과 다섯 가지 맛, 먼 나라의 진기한 것, 기이한 사물로 마음을 바꾸고 뜻을 바꾸며 정신을 흔들고 혈기를 동요시키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무릇 천지가 재물을 낳음은 본디 다섯[五行]에 지나지 않으니, 성인이 오행을 절제하면 다스림이 황폐하지 않는다.

무릇 사람의 본성은 마음이 화하고 욕망을 얻으면 즐겁고, 즐거우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뛰고, 뛰면 흔들리고, 흔들리면 노래하고, 노래하면 춤춘다. 사람의 본성은 마음에 근심과 상실이 있으면 슬프고, 슬프면 애통하고, 애통하면 분하고, 분하면 노하고, 노하면 움직인다. 그러므로 종과 북, 피리는 기쁨을 꾸미는 바요, 상복과 지팡이, 곡(哭)과 발구르기에 절도가 있음은 슬픔을 꾸미는 바이며, 무기와 깃발, 징과 북, 도끼는 노여움을 꾸미는 바이다. 반드시 그 본질[質]이 있어야 비로소 그것을 꾸민다.

그러므로 군대는 사나움을 토벌하는 것이지 사나움을 행하는 것이 아니요, 음악은 화합을 이루는 것이지 음란함을 위한 것이 아니며, 상례는 슬픔을 다하는 것이지 거짓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섬김에 도가 있으되 사랑을 힘쓰고, 조정에 용모가 있으되 공경을 으뜸으로 하며, 상을 치름에 예가 있으되 슬픔을 주로 하고, 군대를 씀에 술(術)이 있으되 의를 근본으로 한다. 근본이 서면 도가 행해지고, 근본이 상하면 도가 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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