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자 01 원도훈(原道訓)

회남자(淮南子) · 전한 유안 · 번역·감수 허유

《회남자》의 첫 편으로, 만물의 근원인 도(道)의 본질과 그것을 체득한 자의 처세를 논한다. 도는 천지를 덮고 싣되 형체가 없으며, 음양을 머금고 사시를 조절하며 오행을 고르게 한다(節四時而調五行). 도를 따르는 자는 무위(無爲)로써 만물의 자연을 좇고, 부드러움과 약함을 지켜 강함을 이루며, 정(精)·신(神)·기(氣)를 온전히 보존한다.

핵심 구절 — 원문과 번역

其德優天地而和陰陽,節四時而調五行。

그 덕은 천지보다 넉넉하여 음양을 화합시키고, 사시(四時)를 조절하며 오행(五行)을 고르게 한다.

是故大丈夫恬然無思,澹然無慮;以天為蓋,以地為輿;四時為馬,陰陽為御。

그러므로 대장부는 편안히 생각이 없고 담담히 근심이 없으니, 하늘을 덮개로 삼고 땅을 수레로 삼으며, 사시를 말로 삼고 음양을 마부로 삼는다.

故柔弱者,生之榦也;而堅強者,死之徒也。

그러므로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줄기요,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다.

夫形者,生之舍也;氣者,生之充也;神者,生之制也。

대저 형체란 삶의 집이요, 기란 삶의 채움이요, 신이란 삶의 주재이다.

번역

(1) 도(道)의 본질

도란 하늘을 덮고 땅을 실으며, 사방을 넓히고 팔극(八極)을 열어, 높아도 끝에 이를 수 없고 깊어도 헤아릴 수 없으며, 천지를 감싸고 형체 없는 것에서 받아 베푼다. 근원의 흐르는 샘물처럼 솟아나 비어 있으면서도 서서히 차오르고, 혼탁하게 뒤섞였다가 서서히 맑아진다. 그러므로 세우면 천지에 가득 차고, 뉘면 사해(四海)에 두루 미치며, 베풀어도 끝이 없어 아침저녁의 한계가 없다. 펴면 육합(六合)을 덮고 말면 한 줌에도 차지 않는다. 묶이면서도 능히 펴지고, 그윽하면서도 능히 밝으며, 약하면서도 능히 강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굳세다. 사유(四維)를 가로질러 음양을 머금고, 우주를 둘러 삼광(三光, 해·달·별)을 밝힌다. 매우 진흙처럼 차지면서도 매우 가늘고 미세하다. 산은 이로써 높고, 못은 이로써 깊으며, 짐승은 이로써 달리고, 새는 이로써 날며, 해와 달은 이로써 밝고, 별과 역수(星歷)는 이로써 운행하며, 기린은 이로써 노닐고, 봉황은 이로써 날아오른다.

태고(泰古)의 두 황제(二皇)는 도의 자루를 얻어 중앙에 서서, 신(神)이 조화와 더불어 노닐며 사방을 어루만졌다. 그러므로 하늘은 운행하고 땅은 멈추되 수레바퀴처럼 굴러 그침이 없고, 물은 흐르되 멎지 않아 만물과 더불어 끝나고 시작한다. 그 덕은 천지보다 넉넉하여 음양을 화합시키고, 사시를 조절하며 오행을 고르게 한다(節四時而調五行). 따뜻이 덮어 길러 만물 무리가 살아가니, 초목을 적시고 금석(金石)에 스며들며, 짐승은 크게 자라고 털은 윤택해진다. … 덕을 머금음(含德)이 이르게 한 바이다.

대저 지극한 도(太上之道)는 만물을 낳되 소유하지 않고, 조화의 형상을 이루되 주재하지 않는다. … 거두어 쌓아도 더 부유해지지 않고, 베풀어 주어도 더 가난해지지 않는다. 쌓아도 높아지지 않고, 무너뜨려도 낮아지지 않으며, 더해도 많아지지 않고, 덜어도 적어지지 않으며, 깎아도 얇아지지 않고, 죽여도 다치지 않으며, 뚫어도 깊어지지 않고, 메워도 얕아지지 않는다. 홀연하고 황홀하여 형상으로 삼을 수 없도다.

옛날 풍이(馮夷)와 대병(大丙)이 수레를 몰 때는, 구름 수레를 타고 무지개에 들어가 옅은 안개에 노닐며 황홀 속을 내달려, 먼 곳을 지나 높은 곳을 다해 갔다. … 그러므로 대장부는 편안히 생각이 없고 담담히 근심이 없으니, 하늘을 덮개로 삼고 땅을 수레로 삼으며, 사시(四時)를 말로 삼고 음양을 마부로 삼아,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 조화하는 자와 함께한다. … 하늘을 덮개로 삼으면 덮지 못함이 없고, 땅을 수레로 삼으면 싣지 못함이 없으며, 사시를 말로 삼으면 부리지 못함이 없고, 음양을 마부로 삼으면 갖추지 못함이 없다. 그러므로 도의 요체의 자루를 잡고 무궁한 경지에서 노닌다. 그러므로 천하의 일은 억지로 할 수 없으니, 그 자연을 따라 미루어 갈 뿐이다. 만물의 변화는 다 궁구할 수 없으니, 그 요점이 돌아가는 향방을 잡을 뿐이다.

(2) 무위(無爲)와 자연

대저 거울과 물이 형체와 접할 때 지혜와 꾀를 쓰지 않아도 네모와 원, 굽음과 곧음이 능히 달아나지 못한다. … 사람이 태어나 고요한 것은 하늘의 본성(天之性)이요, 외물에 감응한 뒤 움직이는 것은 본성의 해침이다. 외물이 이르러 능히 신묘하게 응하는 것은 지각의 움직임이다. 지각이 외물과 접하여 좋고 미워함이 생겨난다. 좋고 미워함이 형체를 이루어 지각이 밖으로 유혹되면 자기에게 돌아오지 못하여 천리(天理)가 멸한다. 그러므로 도에 통달한 자는 인위로써 하늘을 바꾸지 않고, 밖으로는 외물과 더불어 변화하되 안으로는 그 정(情)을 잃지 않는다.

대저 큰 도를 버리고 작은 술수에 맡기는 것은, 게에게 쥐를 잡게 하고 두꺼비에게 벼룩을 잡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간사함을 금하고 사악함을 막기에 부족하여 어지러움이 도리어 더 번성한다. 옛날 하(夏)의 곤(鯀)이 세 길 높이의 성을 쌓자 제후가 등을 돌리고 바다 밖에 교활한 마음이 생겼다. 우(禹)는 천하가 배반함을 알고 성을 허물고 못을 메우며 재물을 흩고 갑옷과 병기를 불사르며 덕을 베푸니, 바다 밖이 복종하고 사방 오랑캐가 조공하여, 도산(塗山)에서 제후를 회합하매 옥백(玉帛)을 잡은 자가 만국이었다. 그러므로 도를 체득한 자는 편안하여 궁하지 않고, 술수에 맡기는 자는 수고로워도 공이 없다.

(3) 자연의 형세

대저 부평초는 물에 뿌리내리고 나무는 흙에 뿌리내리며, 새는 허공을 가르며 날고 짐승은 땅을 밟고 달리며, 교룡은 물에 살고 호랑이와 표범은 산에 거하니, 천지의 본성이다. 두 나무가 서로 비비면 불이 일어나고, 쇠와 불이 서로 지키면 녹아 흐르며, 둥근 것은 항상 구르고 빈 것은 떠오름을 주관하니, 자연의 형세이다. 그러므로 봄바람이 이르면 단비가 내려 만물을 낳아 기르니, 깃 달린 것은 알을 품고 털 달린 것은 새끼를 배며, 초목은 꽃피우고 새와 짐승은 알을 낳고 새끼를 낳되, 그렇게 하는 자를 보지 못하나 공이 이미 이루어진다. 가을바람이 서리를 내리면 거꾸로 자라던 것이 꺾여 상하고, 매와 수리가 사납게 치며 곤충이 숨고, 초목이 뿌리로 돌아가고 물고기와 자라가 못으로 모이되, 그렇게 하는 자를 보지 못하나 사라져 형체가 없다.

그러므로 귤나무가 강북으로 가면 변하여 탱자가 되고, 구욕새는 제수(濟水)를 넘지 못하며, 담비가 문수(汶水)를 건너면 죽으니, 형체와 본성은 바꿀 수 없고 형세와 거처는 옮길 수 없다. 그러므로 도에 통달한 자는 청정함으로 돌아가고, 만물을 궁구한 자는 무위로 끝맺는다. 편안함으로 본성을 기르고 담박함으로 정신을 두면 천문(天門)에 들어간다. 이른바 하늘이란 순수하고 질박하며 곧고 희어 처음부터 잡것과 섞임이 없는 것이요, 이른바 사람이란 지혜와 꾀를 짝지어 교묘히 거짓되이 속이며 세상 사람과 더불어 굽실거리고 세속과 사귀는 것이다. 하늘을 좇는 자는 도와 더불어 노니는 자요, 사람을 따르는 자는 세속과 사귀는 자이다.

(4) 부드러움과 약함의 도

대저 우물 안 물고기와 큰 것을 말할 수 없음은 좁은 데 갇혔기 때문이요, 여름 벌레와 추위를 말할 수 없음은 한 철에 매였기 때문이요, 굽은 선비와 지극한 도를 말할 수 없음은 세속에 갇히고 가르침에 묶였기 때문이다. … 도를 얻은 자는 뜻은 약하되 일은 강하고, 마음은 비었으되 응함은 마땅하다. … 그러므로 굳세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부드러움으로 지키고, 강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약함으로 보전한다. 부드러움을 쌓으면 굳세지고 약함을 쌓으면 강해지니, 그 쌓는 바를 보면 화복(禍福)의 향방을 안다. … 그러므로 병기가 강하면 멸하고, 나무가 강하면 부러지며, 가죽이 단단하면 찢어지고, 이는 혀보다 단단하나 먼저 닳는다. 그러므로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줄기요,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다. 먼저 부르는 자는 궁함의 길이요, 뒤에 움직이는 자는 통달의 근원이다.

천하의 만물 중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크기는 끝이 없고 깊이는 헤아릴 수 없으며 … 위로 하늘에 오르면 비와 이슬이 되고 아래로 땅에 내리면 윤택함이 되어, 만물이 이를 얻지 못하면 살지 못하고 온갖 일이 이를 얻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것을 지극한 덕(至德)이라 한다. 노담(老聃)의 말에 이르기를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지극히 단단한 것을 부린다. 있음 없는 데서 나와 틈 없는 데로 들어간다. 나는 이로써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하였다. 대저 형체 없는 것은 만물의 큰 조상이요, 소리 없는 것은 소리의 큰 종주이다.

(5) 하나(一)와 오음·오미·오색

이런 까닭에 형체 없음에서 형체 있음이 생겨나고, 소리 없음에서 오음(五音)이 울리며, 맛 없음에서 오미(五味)가 이루어지고, 색 없음에서 오색(五色)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있음은 없음에서 생기고 실(實)은 허(虛)에서 나온다. 음(音)의 수는 다섯에 불과하나 오음의 변화는 다 들을 수 없고, 맛의 조화는 다섯에 불과하나 오미의 변화는 다 맛볼 수 없으며, 색의 수는 다섯에 불과하나 오색의 변화는 다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음이란 궁(宮)이 서면 오음이 이루어지고, 맛이란 단맛(甘)이 서면 오미가 정해지며, 색이란 흰색(白)이 서면 오색이 이루어지고, 도란 하나(一)가 서면 만물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치는 사해에 베풀어지고, 하나의 풀이는 천지에 닿는다.

(6) 정신(精神)·기(氣)·형(形)의 보존

대저 기뻐하고 성냄은 도의 사특함이요, 근심하고 슬퍼함은 덕의 잃음이며, 좋아하고 미워함은 마음의 허물이요, 즐기고 욕심냄은 본성의 누(累)이다. 사람이 크게 노하면 음(陰)을 깨뜨리고 크게 기뻐하면 양(陽)을 떨어뜨리며 … 그러므로 마음에 근심과 즐거움이 없음은 덕의 지극함이요, 통하되 변치 않음은 고요함의 지극함이며, 즐기고 욕심냄을 싣지 않음은 비움의 지극함이요, 좋아하고 미워함이 없음은 평정의 지극함이며, 외물에 흩어지지 않음은 순수함의 지극함이다. 이 다섯을 능히 하면 신명(神明)에 통한다.

대저 형체(形)란 삶의 집이요, 기(氣)란 삶의 채움이요, 신(神)이란 삶의 주재이다. 하나라도 자리를 잃으면 셋이 모두 상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그 자리에 처하고 그 직분을 지켜 서로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 … 이 셋은 삼가 지키지 않을 수 없다.

대저 정신과 기지(氣志)는 고요하여 날로 채워지면 강건해지고, 조급하여 날로 소모되면 늙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신(神)을 길러 보양하고 그 기를 화하게 하며 그 형체를 평정히 하여, 도와 더불어 부침하고 굽혔다 폈다 하니, 편안하면 놓아두고 급하면 쓴다. 놓아둘 때는 옷을 벗어 던지듯 하고 쓸 때는 쇠뇌의 방아쇠를 당기듯 한다. 이와 같으면 만물의 변화에 만나지 못함이 없고 온갖 일의 변화에 응하지 못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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