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번로 35 심찰명호(深察名號)

춘추번로(春秋繁露) · 전한 동중서 · 번역·감수 허유

천하를 다스리는 단서는 큰 것을 분별함에 있고, 큰 것을 분별하는 단서는 명칭(名號)을 깊이 살핌에 있다고 본다. 명(名)과 호(號)는 모두 하늘의 뜻(天意)을 통해 나온 것이며, 명칭이 바르면 시비와 역순이 절로 드러난다. 또한 이 편은 성(性)과 정(情)을 음양에 견주어 논하며, 본성은 선의 바탕(善質)은 있으나 아직 선 자체는 아니어서 왕의 가르침(王教)을 기다려야 선이 된다고 본다.

핵심 구절 — 원문과 번역

治天下之端,在審辨大;辨大之端,在深察名號。

천하를 다스리는 단서는 큰 것을 잘 분별함에 있고, 큰 것을 분별하는 단서는 명칭을 깊이 살핌에 있다.

故性比於禾,善比於米;米出禾中,而禾未可全為米也;善出性中,而性未可全為善也。

그러므로 본성은 벼에 견주고 선은 쌀에 견주니, 쌀은 벼 가운데서 나오나 벼가 온전히 쌀이 될 수는 없고, 선은 본성 가운데서 나오나 본성이 온전히 선이 될 수는 없다.

身之名取諸天,天兩,有陰陽之施,身亦兩,有貪仁之性。

몸의 명은 하늘에서 취하였으니, 하늘이 둘이어서 음양의 베풂이 있고, 몸도 둘이어서 탐욕과 어짊의 본성이 있다.

번역

천하를 다스리는 단서는 큰 것을 잘 분별함에 있고, 큰 것을 분별하는 단서는 명칭을 깊이 살핌에 있다. 명(名)이란 큰 이치의 첫 장(章)이니, 그 첫 장의 뜻을 기록하여 그 가운데 일을 엿보면 시비를 알 수 있고 역순(逆順)이 절로 드러나, 그 기틀이 천지에 통한다. 시비의 바름은 역순에서 취하고, 역순의 바름은 명칭에서 취하며, 명칭의 바름은 천지에서 취하니, 천지가 명칭의 큰 뜻(大義)이다. 옛 성인이 부르짖어 천지를 본떠 호(號)라 하고, 울려 명령을 베풀어 명(名)이라 하였다. 명이란 울림(鳴)과 명령(命)이요, 호란 부르짖어(謞) 본뜸(效)이다. 명과 호는 소리는 다르나 근본은 같으니, 모두 부르짖고 울려 하늘의 뜻에 닿는 것이다. 하늘은 말하지 않되 사람을 시켜 그 뜻을 펴게 하고, 행하지 않되 사람을 시켜 그 가운데를 행하게 하니, 명이란 성인이 하늘의 뜻을 편 것이라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천명을 받은 임금은 하늘의 뜻이 부여한 바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라 부름은 하늘을 아비로 보아 효도로 하늘을 섬김이 마땅하고, 제후(諸侯)라 부름은 받들어 모시는 천자를 삼가 살핌이 마땅하며, 대부(大夫)라 부름은 충신을 두텁게 하고 예의를 도탑게 하여 그 선함이 필부보다 커서 교화할 만함이 마땅하고, 사(士)란 일함(事)이요, 민(民)이란 눈 감음(瞑)이니, 사는 교화에 미치지 못하므로 일을 지켜 위를 따르게 할 뿐이다. 이 다섯 호칭은 각기 분수가 있고, 분수 가운데 곡절이 있으며, 곡절마다 명(名)이 있으니, 명은 호보다 많다. 호는 그 큰 전체를 들고, 명은 그 나뉘고 흩어짐을 이름한다. 호는 두루뭉술하고 간략하며, 명은 자상하고 조목조목하다. 귀신을 흠향함은 호로 하나이니 제(祭)라 하고, 제의 흩어진 명칭은 봄에 사(祠), 여름에 약(礿), 가을에 상(嘗), 겨울에 증(烝)이다. 금수를 사냥함은 호로 하나이니 전(田)이라 하고, 전의 흩어진 명칭은 봄에 묘(苗), 가을에 수(蒐), 겨울에 수(狩), 여름에 미(獼)이니,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음이 없다. 만물에 호가 있고 호에 흩어진 명이 있음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일은 각기 명을 따르고, 명은 각기 하늘을 따르니, 하늘과 사람의 사이가 합하여 하나가 된다. 같이하여 이치에 통하고, 움직여 서로 더하며, 따라서 서로 받음을 덕도(德道)라 한다. 『시경』에 「오직 부르짖는 이 말이여, 차례가 있고 자취가 있다」 하였으니 이를 이름이다.

왕(王) 호칭의 큰 뜻을 깊이 살피면 그 안에 다섯 갈래가 있으니 황(皇)·방(方)·광(匡)·황(黃)·왕(往)이다. 이 다섯을 한마디로 합하여 왕이라 한다. 왕이란 황(皇, 큼)이요, 방(方, 바름)이요, 광(匡, 두루 바로잡음)이요, 황(黃, 아름다움)이요, 왕(往, 돌아옴)이다. 그러므로 왕의 뜻이 넓고 커서 황(皇)하지 못하면 도가 정직하여 방(方)할 수 없고, 도가 방하지 못하면 덕이 두루 바로잡을 수 없으며, 덕이 두루 미치지 못하면 아름다움이 황하지 못하고, 아름다움이 황하지 못하면 사방이 돌아오지 못하니, 사방이 돌아오지 못하면 왕으로서 온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하늘은 덮음에 밖이 없고 땅은 실음에 두루 사랑하며, 바람은 명령을 행하여 그 위엄을 하나로 하고, 비는 베풂을 펴서 그 덕을 고르게 하니, 왕의 도술을 이름이다.

임금(君) 호칭의 큰 뜻을 깊이 살피면 그 안에 또 다섯 갈래가 있으니 원(元)·원(原)·권(權)·온(溫)·군(群)이다. 이 다섯을 한마디로 합하여 군(君)이라 한다. 군이란 원(元, 으뜸)이요, 원(原, 근원)이요, 권(權, 저울질)이요, 온(溫, 따뜻함)이요, 군(群, 무리)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뜻이 으뜸에 견주지 못하면 움직여 근본을 잃고, 근본을 잃으면 행하는 바가 서지 못하며, 행함이 서지 못하면 근원에 본받지 못하고, 근원에 본받지 못하면 스스로 버려지며, 스스로 버려지면 교화가 행해지지 않는다. 변(變)에 권(權)을 쓰면 중도(中適)의 마땅함을 잃고, 중도의 마땅함을 잃으면 도가 평탄하지 못하고 덕이 따뜻하지 못하며, 도가 평탄하지 못하고 덕이 따뜻하지 못하면 무리가 가까이 편안하지 못하고, 무리가 편안하지 못하면 흩어져 모이지 않으며, 흩어져 모이지 않으면 임금으로서 온전하지 못하다.

명(名)은 참됨(真)에서 생기니, 그 참됨이 아니면 명으로 삼지 않는다. 명이란 성인이 사물을 참되게 하는 것이니, 명이란 말은 참됨이다. 그러므로 무릇 온갖 비방의 어두운 것은 각기 그 참됨으로 돌아가면 어둡던 것이 도로 밝아진다. 굽고 곧음을 살피려면 먹줄을 당기는 것만 한 것이 없고, 시비를 살피려면 명을 당기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명이 시비를 살핌은 먹줄이 곡직을 살핌과 같다. 그 명과 실(實)을 따지고 그 떨어지고 합함을 살피면 시비의 실정을 서로 속일 수 없다. 지금 세상이 본성(性)에 어두워 말하는 자가 같지 않으니, 어찌 본성의 명칭으로 돌이켜 시험하지 않는가. 본성(性)의 명칭은 남(生)이 아니겠는가. 그 타고난 자연의 바탕(資)을 본성이라 한다. 본성이란 바탕(質)이니, 본성의 바탕을 선(善)이라는 명칭에 따져 능히 들어맞겠는가. 이미 들어맞지 못하는데도 오히려 그 바탕을 선이라 함은 어찌된 일인가. 본성의 명칭은 바탕을 떠날 수 없으니, 바탕을 떠나기를 터럭만큼이라도 하면 본성이 아니다.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춘추』가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여 그 명을 바로잡되, 사물을 그 참됨대로 이름하여 가을 터럭의 끝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운석(霣石, 떨어진 돌)」이라 함에는 그 다섯(五)을 뒤에 두고, 「퇴익(退鷁, 물러나 나는 새)」이라 함에는 그 여섯(六)을 앞에 두었다. 성인이 명을 바로잡음에 삼감이 이와 같으니, 군자는 그 말에 구차함이 없을 뿐이다. 「오석(五石)·육익(六鷁)」의 말이 이것이다. 온갖 악을 안에 머금어 밖으로 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음(心)이니, 그러므로 마음의 명은 머금음(栣)이다. 사람이 기를 받음에 진실로 악이 없다면 마음이 무엇을 머금겠는가. 나는 마음(心)의 명으로 사람의 진실됨(誠)을 얻으니, 사람의 진실됨에는 탐욕(貪)도 있고 어짊(仁)도 있어 어짊과 탐욕의 기가 둘 다 몸에 있다. 몸(身)의 명은 하늘에서 취하였으니, 하늘이 둘이어서 음양의 베풂이 있고, 몸도 둘이어서 탐욕과 어짊의 본성이 있다. 하늘에 음양의 금함(禁)이 있고 몸에 정욕의 머금음(栣)이 있으니, 하늘의 도와 하나이다. 이러므로 음의 운행이 봄여름을 범하지 못하고, 달의 백(魄)이 항상 햇빛에 눌리니, 하늘이 음을 금함이 이와 같다. 어찌 그 욕심을 덜고 그 정을 그쳐 하늘에 응하지 않겠는가. 하늘이 금하는 바를 몸이 금하므로 「몸은 하늘과 같다」 하니, 하늘이 금하는 바를 금함은 하늘을 금함이 아니다. 반드시 천성(天性)이 가르침에 오르지 않으면 끝내 머금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실(實)을 살펴 명으로 삼으니, 가르침이 없을 때 본성이 어찌 갑자기 이와 같겠는가.

그러므로 본성은 벼(禾)에 견주고 선은 쌀(米)에 견준다. 쌀은 벼 가운데서 나오나 벼가 온전히 쌀이 될 수는 없고, 선은 본성 가운데서 나오나 본성이 온전히 선이 될 수는 없다. 선과 쌀은 사람이 하늘을 이어 밖에서 이루는 것이요, 하늘이 행하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행하는 바는 이르는 데가 있어 그치니, 그침의 안을 천성(天性)이라 하고 그침의 밖을 인사(人事)라 한다. 일은 본성 밖에 있으나 본성은 덕을 이루지 않을 수 없다. 민(民)의 호칭은 눈 감음(瞑)에서 취하였으니, 본성이 이미 선하다면 무슨 까닭으로 눈 감음을 호로 삼았겠는가. 떨어진 자(霣者)로 말하면, 붙들어 주지 않으면 거꾸러지고 미쳐 날뛰니 어찌 능히 선하겠는가. 본성은 눈(目)과 비슷하니, 눈이 그윽한 데 누워 감겨 있어 깨어난 뒤에야 보고, 깨어나기 전에는 보는 바탕은 있다 하겠으나 본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만민의 본성은 그 바탕은 있으나 아직 깨어나지 못하였으니, 마치 눈 감은 자가 깨어남을 기다리듯 가르친 뒤에야 선해진다. 깨어나기 전에는 선한 바탕(善質)은 있다 하겠으나 선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눈이 감겼다가 깨어남에 일치하는 비유이다. 고요한 마음으로 천천히 살피면 그 말을 알 수 있다.

본성이 눈 감겨 깨어나지 못함은 하늘이 한 바요, 하늘이 한 바를 본떠 호를 일으켰으므로 민(民)이라 한다. 민이란 말은 진실로 눈 감음과 같으니, 그 명호를 따라 그 이치에 들어가면 얻는다. 이것이 천지에서 명호를 바로잡음이다. 천지가 낳은 바를 성정(性情)이라 하니, 성과 정이 더불어 하나로 눈 감겨 있어 정 또한 본성이다. 본성이 이미 선하다 한다면 그 정은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본성이 선하다 하지 않으니, 그 명을 어지럽힘이다. 몸에 성정이 있음은 하늘에 음양이 있음과 같으니, 사람의 바탕을 말하되 그 정을 없다 함은 하늘의 양을 말하되 그 음을 없다 함과 같으니, 끝까지 논하는 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본성을 이름함에 위(上)로도 아래(下)로도 하지 않고 그 가운데(中)로 이름한다. 본성은 고치(繭)·알(卵)과 같으니, 알은 품기를 기다려 새끼가 되고, 고치는 켜기를 기다려 실이 되며, 본성은 가르침을 기다려 선이 되니, 이를 참된 하늘(真天)이라 한다.

하늘이 낳은 민의 본성은 선한 바탕은 있으나 아직 선할 수 없다. 이에 그를 위해 왕을 세워 선하게 하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다. 민은 아직 선할 수 없는 본성을 하늘에서 받고, 물러나 본성을 이루는 가르침을 왕에게서 받으니,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민의 본성을 이룸을 임무로 하는 자이다. 지금 그 참된 바탕을 살펴 민의 본성이 이미 선하다 함은 하늘의 뜻을 잃고 왕의 임무를 버림이다. 만민의 본성이 진실로 이미 선하다면 왕이 천명을 받아 무슨 임무가 있겠는가. 그 명을 세움이 바르지 못하므로 무거운 임무를 버리고 큰 명을 어기니, 법다운 말이 아니다. 『춘추』의 말에 안의 일이 밖을 기다리는 것은 밖에서 말한다. 지금 만민의 본성은 밖의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 선할 수 있으니, 선은 마땅히 가르침에 돌리고 본성에 돌리지 않아야 한다. 본성에 돌리면 거짓이 많아 정밀하지 못하고, 스스로 공을 이루어 현성(賢聖)이 없으니, 이는 세상 어른이 잘못 낸 바요 『춘추』가 말을 짓는 법이 아니다. 법답지 못한 말, 증험 없는 설은 군자가 멀리하는 바이니 어찌 그것으로 삼겠는가.

혹자가 「본성에 선한 단서(善端)가 있고 마음에 선한 바탕(善質)이 있으니 오히려 어찌 선이 아니겠는가」 하면, 응하여 말하기를 「아니다. 고치에 실이 있으나 고치가 실은 아니요, 알에 새끼가 있으나 알이 새끼는 아니다. 유에 견줌이 다 그러하니 무슨 의심이 있겠는가」 한다. 하늘이 낳은 민에게 여섯 경전(六經)이 있어 본성을 말하는 자는 마땅히 다르지 않아야 하나, 더러는 본성이 선하다 하고 더러는 본성이 아직 선하지 않다 하니, 이른바 선이란 각기 뜻이 다르다. 본성에 선한 단서가 있어 움직여 부모를 사랑함이 금수보다 나으면 선이라 함, 이는 맹자의 선이다. 삼강오기(三綱五紀)를 따르고 팔단(八端)의 이치에 통하며 충신하고 널리 사랑하며 도탑고 예를 좋아함, 이래야 선이라 하니 이는 성인의 선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선인(善人)을 내 보지 못하였으니, 한결같은 자(有常者)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였다. 이로 보건대 성인이 이른바 선이란 쉽게 들어맞지 않으니, 금수보다 나음을 선이라 하지 않는다.

만약 그 단서를 움직임이 금수보다 나음을 선이라 한다면, 선이 어찌 보이지 않겠는가. 무릇 금수보다 나음이 선이 되지 못함은, 마치 초목보다 앎(知)이 앎이라 이름될 수 없음과 같다. 만민의 본성이 금수보다 나으나 선이라 이름될 수 없으니, 앎(知)이라는 명은 성인에게서 취한다. 성인이 명한 바를 천하가 바름으로 삼으니, 아침저녁을 바로잡는 자는 북극성(北辰)을 보고, 의심을 바로잡는 자는 성인을 본다. 성인은 왕 없는 세상, 가르치지 않은 백성은 선에 들어맞을 수 없다고 여겼으니, 선에 들어맞기 어려움이 이와 같은데도 만민의 본성이 다 들어맞을 수 있다 함은 잘못이다. 금수의 본성에 견주면 만민의 본성은 선하나, 인도(人道)의 선에 견주면 민의 본성은 미치지 못한다. 만민의 본성이 금수보다 선함은 허락하되 성인이 이른바 선은 허락하지 않으니, 내가 본성을 명함은 맹자와 다르다. 맹자는 아래로 금수의 행위에 견주었으므로 본성이 이미 선하다 하였고, 나는 위로 성인의 행위에 견주었으므로 본성이 아직 선하지 않다 하니, 선은 본성을 넘고 성인은 선을 넘는다. 『춘추』가 큰 으뜸(大元)을 중히 여기므로 명을 바로잡음에 삼가니, 명이 시작하는 바가 아닌데 어찌 아직 선하다, 이미 선하다 하겠는가.

원문 전문 보기 (한문)

治天下之端,在審辨大;辨大之端,在深察名號。名者,大理之首章也,錄其首章之意,以窺其中之事,則是非可知,逆順自著,其幾通於天地矣。是非之正,取之逆順;逆順之正,取之名號;名號之正,取之天地;天地為名號之大義也。古之聖人,謞而效天地,謂之號,鳴而施命,謂之名。名之為言鳴與命也,號之為言謞而效也,謞而效天地者為號,鳴而命者為名,名號異聲而同本,皆鳴號而達天意者也。天不言,使人發其意;弗為,使人行其中;名則聖人所發天意,不可不深觀也。受命之君,天意之所予也。故號為天子者,宣視天為父,事天以孝道也;號為諸侯者,宜謹視所候奉之天子也;號為大夫者,宜厚其忠信,敦其禮義,使善大於匹夫之義,足以化也;士者,事也,民者、瞑也;士不及化,可使守事從上而已。五號自讚,各有分,分中委曲,曲有名,名眾於號,號其大全。名也者,名其別離分散也,號凡而略,名詳而目,目者,遍辨其事也,凡者,獨舉其大也。享鬼神者號一,曰祭;祭之散名:春曰祠,夏曰礿,秋曰嘗,冬曰烝。獵禽獸者號一,曰田;田之散名:春苗、秋蒐,冬狩,夏獼;無有不皆中天意者。物莫不有凡號,號莫不有散名如是。是故事各順於名,名各順於天,天人之際,合而為一。同而通理,動而相益,順而相受,謂之德道。詩曰:「維號斯言,有倫有跡。」此之謂也。

  深察王號之大意,其中有五科:皇科、方科、匡科、黃科、往科;合此五科以一言,謂之王。王者,皇也,王者,方也,王者,匡也,王者,黃也,王者,往也。是故王意不普大而皇,則道不能正直而方;道不能正直而方,則德不能匡鉉周遍;德不能匡鉉周遍,則美不能黃;美不能黃,則四方不能往;四方不能往,則不全於王。故曰:天覆無外,地載兼愛,風行令而一其威,雨布施而均其德,王術之謂也。

  深察君號之大意,其中亦有五科:元科,原科,權科,溫科,群科:合此五科以一言,謂之君。君者,元也,君者,原也,君者,權也,君者,溫也,君者,群也。是故君意不比於元,則動而失本;動而失本,則所為不立;所為不立,則不效於原;不效於原,則自委舍;自委舍,則化不行;用權於變,則失中適之宜;失中適之宜,則道不平、德不溫;道不平、德不溫,則眾不親安;眾不親安,則離散不群;離散不群,則不全於君。

  名生於真,非其真弗以為名。名者,聖人之所以真物也,名之為言真也。故凡百譏有黮黮者,各反其真,則黮黮者還昭昭耳。欲審曲直,莫如引繩;欲審是非,莫如引名;名之審於是非也,猶繩之審於曲直也。詰其名實,觀其離合,則是非之情不可以相讕已。今世闇於性,言之者不同,胡不試反性之名?性之名,非生與?如其生之自然之資,謂之性。性者,質也,詰性之質於善之名,能中之與?既不能中矣,而尚謂之質善,何哉?性之名不得離質,離質如毛,則非性已,不可不察也。春秋辨物之理,以正其名,名物如其真,不失秋毫之末,故名霣石,則後其五,言退鷁,則先其六。聖人之謹於正名如此,君子於其言,無所苟而已,五石六鷁之辭是也。栣眾惡於內,弗使得發於外者,心也,故心之為名,栣也。人之受氣苟無惡者,心何栣哉?吾以心之名得人之誠,人之誠有貪有仁,仁貪之氣兩在於身。身之名取諸天,天兩,有陰陽之施,身亦兩,有貪仁之性;天有陰陽禁,身有情欲栣,與天道一也。是以陰之行不得干春夏,而月之魄常厭於日光,占全占傷。天之禁陰如此,安得不損其欲而輟其情以應天?天所禁,而身禁之,故曰身猶天也,禁天所禁,非禁天也。必知天性不乘於教,終不能栣。察實以為名,無教之時,性何遽若是?故性比於禾,善比於米;米出禾中,而禾未可全為米也;善出性中,而性未可全為善也。善與米,人之所繼天而成於外,非在天所為之內也。天之所為,有所至而止,止之內謂之天性,止之外謂人事,事在性外,而性不得不成德。民之號,取之瞑也,使性而已善,則何故以瞑為號?以霣者言,弗扶將,則顛陷猖狂,安能善。性有似目,目臥幽而瞑,待覺而後見,當其未覺,可謂有見質,而不可謂見。今萬民之性,有其質而未能覺,譬如瞑者待覺,教之然後善。當其未覺,可謂有善質,而未可謂善,與目之瞑而覺,一概之比也。靜心徐察之,其言可見矣。性而瞑之未覺,天所為也;效天所為,為之起號,故謂之民。民之為言,固猶瞑也,隨其名號,以入其理,則得之矣。是正名號者於天地,天地之所生,謂之性情,性情相與為一瞑,情亦性也,謂性已善,奈其情何?故聖人莫謂性善,累其名也。身之有性情也,若天之有陰陽也,言人之質而無其情,猶言天之陽而無其陰也,窮論者無時受也。名性不以上,不以下,以其中名之。性如繭、如卵,卵待覆而成雛,繭待繅而為絲,性待教而為善,此之謂真天。天生民性有善質而未能善,於是為之立王以善之,此天意也。民受未能善之性於天,而退受成性之教於王,王承天意以成民之性為任者也;今案其真質而謂民性已善者,是失天意而去王任也。萬民之性苟已善,則王者受命尚何任也?其設名不正,故棄重任而違大命,非法言也。春秋之辭,內事之待外者,從外言之。今萬民之性,待外教然後能善,善當與教,不當與性,與性則多累而不精,自成功而無賢聖,此世長者之所誤出也,非春秋為辭之術也。不法之言,無驗之說,君子之所外,何以為哉!或曰:「性有善端,心有善質,尚安非善?」應之曰:「非也。繭有絲,而繭非絲也;卵有雛,而卵非雛也。比類率然,有何疑焉。」天生民有六經,言性者不當異,然其或曰性也善,或曰性未善,則所謂善者,各異意也。性有善端,動之愛父母,善於禽獸,則謂之善,此孟子之善。循三綱五紀,通八端之理,忠信而博愛,敦厚而好禮,乃可謂善,此聖人之善也。是故孔子曰:「善人,吾不得而見之,得見有常者,斯可矣。」由是觀之,聖人之所謂善,未易當也,非善於禽獸則謂之善也,使動其端善於禽獸則可謂之善,善奚為弗見也?夫善於禽獸之未得為善也,猶知於草木而不得名知,萬民之性善於禽獸而不得名善,知之名乃取之聖。聖人之所命,天下以為正,正朝夕者視北辰,正嫌疑者視聖人,聖人以為無王之世,不教之民,莫能當善,善之難當如此,而謂萬民之性皆能當之,過矣。質於禽獸之性,則萬民之性善矣;質於人道之善,則民性弗及也。萬民之性善於禽獸者許之,聖人之所謂善者弗許,吾質之命性者,異孟子。孟子下質於禽獸之所為,故曰性已善;吾上質於聖人之所為,故謂性未善,善過性,聖人過善。春秋大元,故謹於正名,名非所始,如之何謂未善已善也。

이 고전이 말한 사주, 직접 확인해 보세요

춘추번로(春秋繁露)의 명리 원리는 더큼만세력의 분석 알고리즘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내 사주의 용신·격국·오행을 10초 만에 확인하세요.

더큼만세력에서 내 사주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