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02 제물론(齊物論)

장자(莊子) · 전국 장주 · 번역·감수 허유

만물과 모든 시비(是非)·언론을 가지런히 하는 '제물(齊物)'을 논한 편이다. 남곽자기(南郭子綦)가 '나를 잃은(吾喪我)' 경지에서 사람의 퉁소·땅의 퉁소·하늘의 퉁소(三籟)를 말하는 데서 시작하여, 시비 판단의 무근거함, 도추(道樞)와 양행(兩行), 만물과 내가 하나임을 논하고, 끝에 호접몽(胡蝶夢)의 물화(物化)로 맺는다.

원문 · 번역

南郭子綦隱几而坐,仰天而嘘,嗒焉似喪其耦。顏成子游立侍乎前,曰:「何居乎?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子綦曰:「偃,不亦善乎,而問之也!今者吾喪我,汝知之乎?汝聞人籟而未聞地籟,汝聞地籟而未聞天籟夫!」子游曰:「敢問其方。」子綦曰:「夫大塊噫氣,其名爲風。是唯无作,作則萬竅怒呺。而獨不聞之翏翏乎?山林之畏隹,大木百圍之竅穴,似鼻,似口,似耳,似枅,似圈,似臼,似洼者,似汙者;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咬者,前者唱于而隨者唱喁,泠風則小和,飄風則大和,厲風濟則衆竅爲虚。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子游曰:「地籟則衆竅是已,人籟則比竹是已。敢問天籟。」子綦曰:「夫吹萬不同,而使其自己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남곽자기가 안석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우러러 길게 숨을 내쉬니, 멍하니 그 짝(육신)을 잃은 듯하였다. 안성자유(顏成子游)가 앞에 서서 모시고 있다가 말하였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은 진실로 마른 나무처럼 만들 수 있고, 마음은 진실로 식은 재처럼 만들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안석에 기댄 분은 예전에 안석에 기댄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말하였다. "언(偃)아, 또한 좋지 아니하냐, 네가 그것을 물음이! 지금 나는 나를 잃었는데(吾喪我), 네가 그것을 아느냐? 너는 사람의 퉁소(人籟)는 들었으나 아직 땅의 퉁소(地籟)는 듣지 못했고, 땅의 퉁소는 들었으나 아직 하늘의 퉁소(天籟)는 듣지 못했구나!" 자유가 말하였다. "감히 그 방도를 묻습니다." 자기가 말하였다. "무릇 큰 땅덩이가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 한다. 이것이 일지 않으면 그만이나, 일면 온갖 구멍이 성내어 부르짖는다. 너는 유독 그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 산림의 가파른 곳, 둘레가 백 아름인 큰 나무의 구멍들이,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두공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으며,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데, 물 부딪는 소리·화살 나는 소리·꾸짖는 소리·들이쉬는 소리·외치는 소리·울부짖는 소리·깊은 소리·새된 소리를 내어, 앞의 것이 우우 하고 부르면 뒤의 것이 웅웅 하고 따른다. 산들바람에는 작게 화답하고 회오리바람에는 크게 화답하다가,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뭇 구멍이 텅 빈다. 너는 유독 저 흔들흔들·살랑살랑하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자유가 말하였다. "땅의 퉁소란 뭇 구멍이 내는 것이고, 사람의 퉁소란 대를 늘어놓은 악기이군요. 감히 하늘의 퉁소를 묻습니다." 자기가 말하였다. "무릇 불어대는 것이 만 가지로 같지 않으나 제 스스로 그리되게 하는 것이니, 모두 제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 성내게 하는 것이 그 누구이겠느냐!"

大知閑閑,小知間間;大言炎炎,小言詹詹。其寐也魂交,其覺也形開,與接爲構,日以心鬬。縵者,窖者,密者。小恐惴惴,大恐縵縵。其發若機栝,其司是非之謂也;其留如詛盟,其守勝之謂也;其殺如秋冬,以言其日消也;其溺之所爲之,不可使復之也;其厭也如緘,以言其老洫也。近死之心,莫使復陽也。喜怒哀樂,慮嘆變慹,姚佚啓態,樂出虚,蒸成菌。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已乎,已乎!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非彼无我,非我无所取,是亦近矣,而不知其所爲使。若有真宰,而特不得其朕,可行已信,而不見其形,有情而无形。百骸、九竅、六藏,賅而存焉,吾誰與爲親?汝皆悅之乎?其有私焉?如是,皆有爲臣妾乎?其臣妾不足以相治乎?其遞相爲君臣乎?其有真君存焉。如求得其情與不得,无益損乎其真。一受其成形,不亡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无師乎?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愚者與有焉。未成乎心而有是非,是今日適越而昔至也,是以无有爲有。无有爲有,雖有神禹,且不能知,吾獨且奈何哉!

큰 앎은 한가롭고 너그러우며 작은 앎은 사소한 것을 따진다. 큰 말은 담박하고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잠들면 혼이 뒤엉키고 깨어나면 몸이 열리어, 접하는 것마다 얽혀 날마다 마음으로 다툰다. 느긋한 자, 깊이 감춘 자, 빈틈없는 자가 있다. 작은 두려움에는 흠칫거리고 큰 두려움에는 넋을 잃는다. 그 발함이 쇠뇌의 시위 같음은 시비를 살핌을 말함이요, 그 머묾이 맹세 같음은 이김을 지킴을 말함이요, 그 스러짐이 가을과 겨울 같음은 날로 사라짐을 말함이다. 그것이 하는 바에 빠져들면 다시 돌이키게 할 수 없다. 그것이 싫증남이 봉함한 듯함은 늙어 막힘을 말함이니, 죽음에 가까운 마음은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없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근심과 탄식, 변덕과 두려움, 경박함과 방종, 솔직함과 꾸밈이 음악이 빈 데서 나오고 김이 버섯을 이루듯 한다. 밤낮으로 앞에서 번갈아 나타나되 그 싹트는 바를 알지 못한다. 그만두자, 그만두자! 아침저녁으로 이를 얻는 것, 그것이 말미암아 생겨나는 바이리라! 저것(감정)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취할 바가 없다. 이 또한 (진실에) 가깝거니와, 그렇게 시키는 바를 알지 못한다. 참된 주재자(眞宰)가 있는 듯하나 다만 그 조짐을 얻지 못한다. 행함은 이미 믿을 만하나 그 형체를 볼 수 없으니, 정황은 있되 형체가 없다. 백 개의 뼈마디, 아홉 구멍, 여섯 장기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나는 무엇과 더불어 친한가? 너는 그것들을 다 좋아하는가? 거기에 사사로움이 있는가? 이와 같다면 모두 신하나 첩이 되는가? 그 신하와 첩이 서로 다스리기에 부족한가? 번갈아 서로 임금과 신하가 되는가? 거기에 참된 임금(眞君)이 있는가? 그 정황을 얻든 못 얻든 그 참됨에는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한 번 그 형체를 받으면, 죽지 않은 채 다함을 기다린다. 외물과 더불어 서로 베고 서로 갈리며 그 나아감이 말 달리듯 하여 능히 멈출 수 없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죽도록 애써도 그 공을 이룸을 보지 못하고, 고달프게 지쳐도 그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 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는가! 그 몸이 변하면 그 마음도 그와 더불어 그러하니, 큰 슬픔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삶이란 본래 이처럼 아득한 것인가? 아니면 나만 홀로 아득하고 남에게는 아득하지 않은 자가 있는가? 무릇 그 이루어진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구인들 홀로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취하는 자에게만 그것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에게도 있다. 아직 마음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시비가 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떠나 어제 도착했다는 것이니,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비록 신령한 우(禹) 임금이라도 알 수 없거늘, 나 홀로 어찌하겠는가!

夫言非吹也,言者有言,其所言者特未定也。果有言邪?其未嘗有言邪?其以爲異於鷇音,亦有辯乎?其无辯乎?道惡乎隱而有真僞?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物无非彼,物无非是。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是以聖人不由,而照之于天,亦因是也。是亦彼也,彼亦是也。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果且有彼是乎哉?果且无彼是乎哉?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樞始得其環中,以應无窮。是亦一无窮,非亦一无窮也。故曰「莫若以明」。

무릇 말이란 (바람) 불어대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자에게는 말이 있으나, 그 말하는 바가 다만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과연 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일찍이 말이 없는 것인가? 그것을 새 새끼 소리와 다르다 여기지만, 또한 분별이 있는가, 분별이 없는가? 도(道)는 어디에 가려져 참과 거짓이 있게 되었으며, 말은 어디에 가려져 옳고 그름이 있게 되었는가? 도는 어디로 간들 있지 않으며, 말은 어디에 있은들 옳지 않겠는가? 도는 작은 이룸(小成)에 가려지고, 말은 화려함에 가려진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있어, 그르다는 것을 옳다 하고 옳다는 것을 그르다 한다. 그르다는 것을 옳다 하고 옳다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밝음으로써 하는 것(以明)만 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사물은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저쪽에서 보면 보이지 않고, 스스로 알면 그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으로 말미암는다"고 한다. 저것과 이것은 함께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하나 함께 생기면서 함께 죽고, 함께 죽으면서 함께 생긴다. 함께 옳으면서 함께 그르고, 함께 그르면서 함께 옳다. 옳음을 말미암으면 그름을 말미암고, 그름을 말미암으면 옳음을 말미암는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그것(시비)을 말미암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보니, 또한 이것을 말미암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저것이요,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하나의 시비요,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는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는가? 저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못함, 이를 도의 지도리(道樞)라 한다. 지도리라야 비로소 고리의 한가운데를 얻어 끝없음에 응한다. 옳음도 하나의 끝없음이요, 그름도 하나의 끝없음이다. 그러므로 "밝음으로써 하는 것만 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可乎可,不可乎不可。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惡乎然?然於然。惡乎不然?不然於不然。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无物不然,无物不可。故爲是舉莛與楹,厲與西施,恢恑憰怪,道通爲一。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凡物无成與毀,復通爲一。唯達者知通爲一,爲是不用而寓諸庸。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適得而幾矣,因是已。已而不知其然,謂之道。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曰:狙公賦芧,曰:「朝三而暮四。」衆狙皆怒。曰:「然則朝四而暮三。」衆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爲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均,是之謂兩行。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깨우치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으로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말(馬)로 말이 말 아님을 깨우치는 것은, 말 아닌 것으로 말이 말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도 하나의 말이다. 옳으면 옳다 하고 옳지 않으면 옳지 않다 한다. 길은 다녀서 이루어지고, 사물은 일컬어져서 그러하다. 어찌 그러한가? 그러함에서 그러하다. 어찌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음에서 그렇지 않다. 사물에는 본래 그러한 바가 있고, 사물에는 본래 옳은 바가 있다. 그렇지 않은 사물이 없고, 옳지 않은 사물이 없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가는 풀줄기와 큰 기둥, 문둥이와 서시(西施), 엄청나게 괴이한 것들을 들어도, 도는 통하여 하나가 된다. 그 나뉨은 곧 이룸이요, 그 이룸은 곧 무너짐이다. 무릇 사물에는 이룸과 무너짐이 없으니, 다시 통하여 하나가 된다. 오직 통달한 자라야 통하여 하나임을 알아, 이 때문에 (시비를) 쓰지 않고 일상(庸)에 부친다. 일상이란 쓰임이요, 쓰임이란 통함이요, 통함이란 얻음이다. 알맞게 얻으면 (도에) 가까우니, 이것을 말미암을 따름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줄을 알지 못함, 이를 도(道)라 한다. 정신을 수고로이 하여 하나로 삼되 그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 이를 조삼(朝三)이라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 하는가? 원숭이 기르는 자가 도토리를 주며 "아침에 셋, 저녁에 넷" 하니 뭇 원숭이가 다 성냈다.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 하니 뭇 원숭이가 다 기뻐했다. 이름과 실질이 이지러지지 않았는데 기쁨과 노여움이 일어났으니, 또한 이것을 말미암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시비로써 조화하여 하늘의 고름(天均)에 쉬니, 이를 양행(兩行)이라 한다.

古之人,其知有所至矣。惡乎至?有以爲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其次以爲有物矣而未始有封也,其次以爲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果且有成與虧乎哉?果且无成與虧乎哉?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无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昭文之鼓琴也,師曠之枝策也,惠子之據梧也,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故載之末年。唯其好之也,以異於彼,其好之也,欲以明之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而其子又以文之綸終,終身无成。若是而可謂成乎,雖我亦成也;若是而不可謂成乎,物與我无成也。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圖也。爲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以明。

옛사람은 그 앎에 지극한 바가 있었다. 어디에 이르렀는가? 일찍이 사물이 있지 않았다고 여기는 자가 있었으니, 지극하고 다하여 더할 수 없다. 그다음은 사물이 있되 일찍이 경계가 있지 않았다고 여겼고, 그다음은 경계가 있되 일찍이 시비가 있지 않았다고 여겼다. 시비가 드러남은 도가 이지러지는 까닭이요, 도가 이지러지는 것은 사사로운 사랑(愛)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과연 이룸과 이지러짐이 있는가? 과연 이룸과 이지러짐이 없는가? 이룸과 이지러짐이 있으니 소씨(昭氏)가 거문고를 탄 것이요, 이룸과 이지러짐이 없으니 소씨가 거문고를 타지 않은 것이다.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타고, 사광(師曠)이 채를 짚고, 혜자가 오동나무에 기댐, 이 세 사람의 앎이 거의 지극하여 모두 융성한 자들이라 만년까지 (그 이름이) 실렸다. 오직 그들이 좋아하여 남과 달랐으니, 그 좋아함으로 남에게 밝히고자 하였다. 밝힐 바가 아닌데 밝히려 하였으므로, 견백(堅白)의 어두움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아들은 또 소문의 줄(거문고 기예)로 끝나 죽도록 이룸이 없었다. 이와 같음을 이룸이라 할 수 있다면 비록 나도 이룸이 있는 것이요, 이와 같음을 이룸이라 할 수 없다면 사물과 나에게 이룸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어지러이 의심스럽게 빛나는 것을 성인은 도모하니, 이 때문에 (시비를) 쓰지 않고 일상에 부친다. 이를 밝음으로써 함(以明)이라 한다.

今且有言於此,不知其與是類乎?其與是不類乎?類與不類,相與爲類,則與彼无以異矣。雖然,請嘗言之。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有有也者,有无也者,有未始有无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无也者。俄而有无矣,而未知有无之果孰有孰无也。今我則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无謂乎?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太山爲小;莫壽乎殤子,而彭祖爲夭。天地與我並生,而萬物與我爲一。既已爲一矣,且得有言乎?既已謂之一矣,且得无言乎?一與言爲二,二與一爲三。自此以往,巧歷不能得,而況其凡乎!故自无適有,以至於三,而況自有適有乎!无適焉,因是已。

지금 여기에 말이 있는데, 이것과 같은 종류인지 같은 종류가 아닌지 알지 못한다. 같은 종류든 같은 종류가 아니든 서로 더불어 종류가 되니, 곧 저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하나 시험 삼아 말해 보겠다. 시작이 있는 것이 있고, 아직 시작이 있지 않은 것이 있고, 아직 '시작이 있지 않음'조차 있지 않은 것이 있다. 있음이 있고, 없음이 있고, 아직 없음이 있지 않은 것이 있고, 아직 '없음이 있지 않음'조차 있지 않은 것이 있다. 문득 있음과 없음이 생기나, 있음과 없음이 과연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 나는 이미 말한 바가 있으나, 내가 말한 바가 과연 말함이 있는 것인지 말함이 없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천하에 가을 터럭 끝보다 큰 것이 없고 태산이 작으며, 일찍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자가 없고 팽조가 요절했다 할 수 있다. 천지가 나와 더불어 함께 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또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하나라 일렀으니 또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와 말이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 이로부터 나아가면 셈 잘하는 자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보통 사람이랴! 그러므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도 셋에 이르거늘,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감이랴! 나아가지 말고 이것을 말미암을 따름이다.

夫道未始有封,言未始有常,爲是而有畛也,請言其畛:有左、有右,有倫、有義,有分、有辯,有競、有爭,此之謂八德。六合之外,聖人存而不論;六合之內,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先王之志,聖人議而不辯。故分也者,有不分也;辯也者,有不辯也。曰:何也?聖人懷之,衆人辯之以相示也,故曰:辯也者,有不見也。夫大道不稱,大辯不言,大仁不仁,大廉不嗛,大勇不忮。道昭而不道,言辯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五者园而幾向方矣。故知止其所不知,至矣。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謂天府。注焉而不滿,酌焉而不竭,而不知其所由來,此之謂葆光。

무릇 도는 일찍이 경계가 있지 않았고 말은 일찍이 일정함이 있지 않았으나, 이 때문에 (말이 생겨) 구분이 있게 되었으니 그 구분을 말해 보겠다. 왼쪽이 있고 오른쪽이 있으며, 차례가 있고 마땅함이 있으며, 나눔이 있고 분별이 있으며, 겨룸이 있고 다툼이 있으니, 이를 여덟 가지 덕(八德)이라 한다. 천지 사방 밖의 일을 성인은 두고서 논하지 않으며, 천지 사방 안의 일을 성인은 논하되 따지지 않는다. 《춘추》는 세상을 다스린 선왕의 뜻이니, 성인은 따지되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눔에는 나누지 못함이 있고, 가림에는 가리지 못함이 있다. 무슨 까닭인가? 성인은 그것을 품고, 뭇사람은 그것을 가려 서로 내보인다. 그러므로 "가린다는 것은 보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무릇 큰 도는 일컬어지지 않고, 큰 가림은 말하지 않으며, 큰 어짊은 어질지 않고, 큰 청렴은 겸양하지 않으며, 큰 용기는 사납지 않다. 도가 드러나면 도가 아니요, 말이 따지면 미치지 못하며, 어짊이 늘 그러하면 이루어지지 않고, 청렴이 맑으면 믿기지 않으며, 용기가 사나우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다섯은 둥글지만 거의 모남으로 향한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데서 그칠 줄 아는 것이 지극하다. 누가 말하지 않는 가림, 도라 하지 않는 도를 아는가? 만약 능히 아는 자가 있다면 이를 하늘의 곳간(天府)이라 한다. 부어도 차지 않고 떠내도 마르지 않으나 그 말미암는 바를 알지 못하니, 이를 감추어진 빛(葆光)이라 한다.

故昔者堯問於舜曰:「我欲伐宗、膾、胥敖,南面而不釋然,其故何也?」舜曰:「夫三子者,猶存乎蓬艾之間。若不釋然,何哉?昔者十日並出,萬物皆照,而況德之進乎日者乎!」

옛날에 요가 순에게 물었다. "내가 종(宗)·회(膾)·서오(胥敖)를 치고자 하나, 임금 자리에 앉아서도 마음이 풀리지 않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순이 말하였다. "저 세 나라는 아직 쑥대밭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마음이 풀리지 않음은 어째서입니까? 옛날에 열 개의 해가 함께 떠 만물이 다 비추어졌거늘, 하물며 덕이 해보다 나아감에야!"

齧缺問乎王倪曰:「子知物之所同是乎?」曰:「吾惡乎知之!」「子知子之所不知邪?」曰:「吾惡乎知之!」「然則物无知邪?」曰:「吾惡乎知之!雖然,嘗試言之。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且吾嘗試問乎汝:民溼寢則腰疾偏死,鰌然乎哉?木處則惴慄恂懼,猨猴然乎哉?三者孰知正處?民食芻豢,麋鹿食薦,蝍蛆甘帶,鴟鴉耆鼠,四者孰知正味?猨猵狙以爲雌,麋與鹿交,鰌與魚游。毛嬙、麗姬,人之所美也,魚見之深入,鳥見之高飛,麋鹿見之決驟,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自我觀之,仁義之端,是非之塗,樊然殽亂,吾惡能知其辯!」齧缺曰:「子不知利害,則至人固不知利害乎?」王倪曰:「至人神矣!大澤焚而不能熱,河漢沍而不能寒,疾雷破山、風振海而不能驚。若然者,乘雲氣,騎日月,而遊乎四海之外。死生无變於己,而況利害之端乎!」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그대는 사물이 다 같이 옳다고 하는 바를 아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그대는 그대가 알지 못하는 바를 아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그러면 사물은 앎이 없는 것입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그러하나 시험 삼아 말해 보겠다. 어찌 내가 이른바 '안다'는 것이 알지 못함이 아닌 줄 알겠으며, 어찌 내가 이른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앎이 아닌 줄 알겠는가? 또 내가 시험 삼아 너에게 묻겠다. 사람이 축축한 데서 자면 허리병이 나고 반신불수가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나무 위에 있으면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데 원숭이도 그러한가? 이 셋 중 누가 바른 거처를 아는가? 사람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뱀을 달게 여기고, 솔개와 까마귀는 쥐를 즐긴다. 이 넷 중 누가 바른 맛을 아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짐승을 짝으로 삼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미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는 사람이 아름답다 여기나,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는 보면 높이 날며, 고라니와 사슴은 보면 마구 달아난다. 이 넷 중 누가 천하의 바른 빛을 아는가? 내가 보건대 어짊과 의로움의 실마리, 옳고 그름의 길은 어지러이 뒤섞여 있으니, 내가 어찌 그 분별을 알겠는가!" 설결이 말하였다. "그대가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지 못한다면, 지인(至人)도 본래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지 못합니까?" 왕예가 말하였다. "지인은 신령하다! 큰 못이 타도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도 춥게 할 수 없으며, 사나운 우레가 산을 쪼개고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놀라게 할 수 없다. 그러한 자는 구름 기운을 타고 해와 달을 부려 사해 밖에 노니, 죽고 삶도 자기에게 변화를 주지 못하거늘, 하물며 이로움과 해로움의 실마리야!"

瞿鵲子問乎長梧子曰:「吾聞諸夫子,聖人不從事於務,不就利,不違害,不喜求,不緣道,无謂有謂,有謂无謂,而遊乎塵垢之外。夫子以爲孟浪之言,而我以爲妙道之行也。吾子以爲奚若?」長梧子曰:「是黃帝之所聽瑩也,而丘也何足以知之!且汝亦大早計,見卵而求時夜,見彈而求鴞炙。予嘗爲汝妄言之,汝以妄聽之。奚旁日月,挾宇宙,爲其䐇合,置其滑涽,以隸相尊?衆人役役,聖人愚芚,參萬歲而一成純。萬物盡然,而以是相藴。予惡乎知悅生之非惑邪?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麗之姬,艾封人之子也。晉國之始得之也,涕泣沾襟;及其至於王所,與王同匡牀,食芻豢,而後悔其泣也。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夢飲酒者,旦而哭泣;夢哭泣者,旦而田獵。方其夢也,不知其夢也。夢之中又占其夢焉,覺而後知其夢也。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而愚者自以爲覺,竊竊然知之。君乎,牧乎,固哉!丘也與汝,皆夢也;予謂汝夢,亦夢也。是其言也,其名爲弔詭。萬世之後,而一遇大聖知其解者,是旦暮遇之也。既使我與若辯矣,若勝我,我不若勝,若果是也,我果非也邪?我勝若,若不吾勝,我果是也,而果非也邪?其或是也,其或非也邪?其俱是也,其俱非也邪?我與若不能相知也。則人固受其黮闇,吾誰使正之?使同乎若者正之,既與若同矣,惡能正之?使同乎我者正之,既同乎我矣,惡能正之?使異乎我與若者正之,既異乎我與若矣,惡能正之?使同乎我與若者正之,既同乎我與若矣,惡能正之?然則我與若與人,俱不能相知也,而待彼也邪?何謂和之以天倪?曰:是不是,然不然。是若果是也,則是之異乎不是也亦无辯;然若果然也,則然之異乎不然也亦无辯。化聲之相待,若其不相待。和之以天倪,因之以曼衍,所以窮年也。忘年忘義,振於无竟,故寓諸无竟。」

구작자(瞿鵲子)가 장오자(長梧子)에게 물었다. "내가 부자(공자)께 들으니 '성인은 일을 일삼지 않고, 이로움에 나아가지 않으며, 해로움을 피하지 않고, 구함을 기뻐하지 않으며, 도를 따르지도 않는다. 말함이 없으되 말함이 있고, 말함이 있으되 말함이 없어, 먼지와 때 밖에서 노닌다'고 하였습니다. 부자는 이를 허황된 말이라 여겼으나 나는 묘한 도의 행함이라 여깁니다. 그대는 어떻게 여기십니까?" 장오자가 말하였다. "이는 황제(黃帝)도 듣고 의아해할 바이거늘, 구(공자)인들 어찌 족히 알겠는가! 또 그대도 너무 일찍 헤아렸으니, 알을 보고 새벽 알리기를 구하고, 탄환을 보고 새 구이를 구하는 격이다. 내가 너를 위해 허튼소리를 할 테니 너도 허투루 들어라. 어찌 해와 달을 곁에 두고 우주를 끼며, 그 어긋남을 합하고 그 어지러움을 두며, 천한 것으로 높은 것을 받들지 않는가? 뭇사람은 애쓰지만 성인은 어리석은 듯하여, 만세를 아울러 하나의 순수함을 이룬다. 만물이 다 그러하니, 이로써 서로 쌓는다. 내가 어찌 삶을 기뻐함이 미혹이 아닌 줄 알겠는가? 내가 어찌 죽음을 싫어함이, 어려서 고향을 잃고 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닌 줄 알겠는가? 여희는 애(艾) 땅 봉인의 딸이었는데, 진(晉)나라가 처음 그를 얻었을 때는 눈물로 옷깃을 적셨으나, 왕의 처소에 이르러 왕과 한 침상을 쓰고 가축의 고기를 먹게 되자 그 울었던 것을 후회하였다. 내가 어찌 죽은 자가 처음에 삶을 바랐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 줄 알겠는가? 꿈에 술을 마신 자가 아침에 곡하며 울고, 꿈에 곡하며 운 자가 아침에 사냥을 나간다. 바야흐로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르고, 꿈속에서 또 그 꿈을 점치다가 깬 뒤에야 그것이 꿈인 줄 안다. 또한 큰 깨달음이 있은 뒤에야 이것이 큰 꿈인 줄 아는데,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깨어 있다 여겨 영악하게 안다 한다. 임금이여, 목동이여 하니 꽉 막혔도다! 구와 너도 다 꿈이요, 내가 너더러 꿈이라 하는 것도 또한 꿈이다. 이 말을 일러 매우 괴이하다(弔詭) 한다. 만세 뒤에라도 그 풀이를 아는 큰 성인을 한 번 만난다면, 이는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셈이다. 가령 나와 네가 따졌는데 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너를 이기지 못했다면, 네가 과연 옳고 내가 과연 그른 것이냐? 내가 너를 이기고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내가 과연 옳고 네가 과연 그른 것이냐? 혹 한쪽이 옳고 한쪽이 그른 것이냐? 혹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이냐? 나와 너는 서로 알 수 없다. 그러면 사람들이 본래 그 어두움을 받으니, 내가 누구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겠는가? 너와 같은 자로 바로잡게 하면 이미 너와 같으니 어찌 바로잡겠으며, 나와 같은 자로 바로잡게 하면 이미 나와 같으니 어찌 바로잡겠는가? 나와 너와 다른 자로 바로잡게 하면 이미 나와 너와 다르니 어찌 바로잡겠으며, 나와 너와 같은 자로 바로잡게 하면 이미 나와 너와 같으니 어찌 바로잡겠는가? 그러면 나와 너와 남이 다 서로 알 수 없으니, 저것(자연)을 기다릴 것인가? 무엇을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함(和之以天倪)이라 하는가? 옳음과 옳지 않음, 그러함과 그렇지 않음을 말한다. 옳음이 과연 옳다면 옳음이 옳지 않음과 다름은 또한 따질 것이 없고, 그러함이 과연 그러하다면 그러함이 그렇지 않음과 다름은 또한 따질 것이 없다. 변하는 소리가 서로 기다림은 마치 서로 기다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 하늘의 고름으로 조화하고 끝없이 펼침으로 말미암아 천수를 다하는 것이다. 나이를 잊고 마땅함을 잊어 끝없음에 떨치니, 그러므로 끝없음에 부치는 것이다."

罔兩問景曰:「曩子行,今子止;曩子坐,今子起,何其无特操與?」景曰:「吾有待而然者邪?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吾待蛇蚹蜩翼邪?惡識所以然?惡識所以不然?」

그림자의 그림자(罔兩)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아까는 그대가 가더니 지금은 그대가 멈추고, 아까는 그대가 앉더니 지금은 그대가 일어나니, 어찌 그리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말하였다. "내가 기대는 것이 있어 그러한 것인가? 내가 기대는 것이 또 기대는 것이 있어 그러한 것인가? 내가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기대는 것인가? 어찌 그러한 까닭을 알며, 어찌 그렇지 않은 까닭을 알겠는가?"

昔者莊周夢爲胡蝶,栩栩然胡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俄然覺,則蘧蘧然周也。不知周之夢爲胡蝶與?胡蝶之夢爲周與?周與胡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옛날에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나는 나비였다. 스스로 유쾌하여 뜻에 맞았던지라 자기가 장주인 줄 알지 못하였다. 문득 깨어 보니 뻣뻣한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물화(物化)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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