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 11 교학(教學)
《근사록》 권11 「교학(教學)」은 사람을 가르치는 도를 논한 편이다. 모두 21개 조목으로, 어린아이를 미리(豫) 가르치는 예교(豫教), 점진과 순서(循循有序), 사람의 장점과 마음의 밝은 곳을 따라 가르치는 인재시교(因材施教), 시(詩)·예(禮)·악(樂)으로 흥기·확립·완성하는 옛 교육 등을 다룬다. 군자가 나아가면 도를 미루어 천하를 깨우치고 물러나면 도를 밝혀 무리를 맑게 하니, 영재를 얻어 교육함이 곧 "백성을 새롭게 함(新民)"의 일이라는 것이 취지이다.
(주: 이 권은 사람을 가르치는 도를 논한다. 군자가 나아가면 이 도를 미루어 천하를 깨우치고, 물러나면 이 도를 밝혀 그 무리를 맑게 한다. 이른바 영재를 얻어 교육함이 곧 "백성을 새롭게 함"의 일이다.)
번역
1. 염계 선생이 말하였다. 굳셈(剛)의 선함은 의(義)가 되고 곧음이 되며 결단이 되고 엄의(嚴毅)가 되며 간고(幹固)가 된다. 그 악함은 사나움이 되고 좁음이 되며 강포함이 된다. 부드러움(柔)의 선함은 자애가 되고 순함이 되며 공손함이 된다. 그 악함은 나약함이 되고 결단 없음이 되며 사녕(邪佞)이 된다. 오직 중(中)이라는 것은 화(和)요 절도에 맞음(中節)이니, 천하의 달도(達道)요 성인의 일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가르침을 세워,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악을 바꾸어 스스로 그 중에 이르러 그치게 할 따름이다.
2.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옛사람은 자식을 낳아 먹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되면 대학(大學)의 법으로 가르치되 미리 함(豫)을 우선으로 삼았다. 사람이 어릴 때는 앎과 생각에 아직 주재하는 바가 없으니, 곧 마땅히 좋은 말과 지극한 의론을 날마다 앞에 베풀어야 한다. 비록 깨달아 알지 못하더라도 우선 마땅히 귀에 젖게 하여, 귀에 차고 배에 채워 오래되면 절로 익숙해져 마치 본래 지닌 것처럼 된다. 비록 다른 말로 미혹시켜도 들어가지 못한다. 만약 미리 하지 않으면, 조금 자람에 이르러 사사로운 뜻과 치우친 기호가 안에서 생기고 뭇사람의 입과 변설이 밖에서 녹이니, 그 순수하고 온전하기를 바라도 될 수 없다.
3. 관(觀)괘 상구(上九)에 "그 삶을 본다. 군자면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상에 "그 삶을 봄은 뜻이 아직 평정하지 못함이다"라고 하였다. 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비록 지위에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덕을 보아 본보기로 삼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스스로 삼가고 살펴 그 사는 바를 본다. 늘 군자됨을 잃지 않으면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잃지 않아 교화된다. 지위에 있지 않다 하여 편안히 뜻을 놓아 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된다.
4. 성인의 도는 하늘처럼 자연하여 뭇사람의 식견과 매우 멀다. 문인 제자가 이미 친히 가르침을 받은 뒤에 더욱 그 높고 먼 것을 안다. 이미 미칠 수 없을 듯하면 좇아 바라는 마음이 게을러진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늘 굽혀서 나아간다. 윗사람을 섬기고 상사(喪事)에 임함에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고, 군자의 떳떳한 행실이 술에 곤하지 않음은 더욱 가까운 것인데, 자기로써 처신하니, 비단 자질이 낮은 자로 하여금 힘써 미치기를 생각하게 할 뿐 아니라, 재질이 높은 자도 가까운 것을 쉽게 여기지 않게 한다.
5.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자제 중 경박하고 빼어난 자를 근심하면, 다만 경학(經學)으로 책을 읽게 가르치고 문장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 자제의 무릇 온갖 즐기는 것들이 모두 뜻을 빼앗는다. 서찰(書札, 글씨)에 이르러서는 유자(儒者)의 일에 가장 가까우나, 한결같이 좋아하면 또한 스스로 뜻을 잃는다. 왕희지·우세남·안진경·유공권 무리는 진실로 좋은 사람이긴 하였으나, 일찍이 글씨 잘 쓰는 자가 도를 안 적이 있던가? 평생의 정력을 여기에 쓰니, 비단 한갓 시일을 허비할 뿐 아니라 도에 방해되는 곳이 있다. 뜻을 잃음을 족히 알 수 있다.
6. 호안정(胡安定, 호원)이 호주(湖州)에서 치도재(治道齋)를 두었다. 배우는 자 중에 다스림의 도를 밝히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그 안에서 강론하였다. 백성 다스림·군사 다스림·수리(水利)·산수(筭數) 따위와 같은 것이다. 일찍이 이르기를, 유이(劉彜)가 수리를 잘 다스렸는데, 뒤에 여러 번 정사를 맡아 모두 수리를 일으켜 공이 있었다.
7. 무릇 말을 세움(立言)은 뜻을 함축하고자 하니, 덕을 아는 자로 하여금 싫증나지 않게 하고 덕이 없는 자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게 한다.
8. 사람을 가르침에 의취(意趣)를 보지 못하면 반드시 배움을 즐기지 않는다. 우선 그를 가무(歌舞)로 가르치려 하니, 옛 시 삼백 편(三百篇)처럼 모두 옛사람이 지은 것이다. 관저(關雎) 따위와 같은 것은 집안을 바로잡는 시초이다. 그러므로 향인(鄉人)에 쓰고 나라에 써서 날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이러한 시는 그 말이 간략하고 깊어 지금 사람이 쉽게 깨닫지 못한다. 따로 시를 지어, 동자(童子)에게 물 뿌리고 비질하며 응대하고 어른 섬기는 절도를 대략 말하여 아침저녁으로 노래하게 하면, 마땅히 도움이 있을 듯하다.
9. 자후(子厚, 장재)가 예(禮)로써 배우는 자를 가르친 것이 가장 좋으니, 배우는 자로 하여금 먼저 의거하여 지킬 바가 있게 하였다.
10. 배우는 자에게 그 본 바가 아직 미치지 못한 이치를 말해 주면, 비단 들은 바가 깊고 투철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이치를 낮게 보게 된다.
11. 춤추고 활 쏘는 데서 곧 사람의 정성을 본다. 옛적의 사람을 가르침은 그로 하여금 자기를 이루게(成己) 함 아닌 것이 없었으니, 물 뿌리고 비질하며 응대하는 데서부터 곧 성인의 일에 이를 수 있었다.
12. "어린 자식에게 늘 속이지 않음을 보임" 이상은 곧 사람을 부리는 일(使人事)로 가르치는 것이다.
13. "먼저 전하고 나중에 게을리한다." 군자가 사람을 가르침에 순서가 있어, 먼저 작은 것·가까운 것을 전하고 나중에 큰 것·먼 것을 가르친다. 먼저 가깝고 작은 것을 전한 뒤에 멀고 큰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14.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글을 (다) 설명하는 것은 반드시 옛 뜻이 아니다. 도리어 사람을 야박하게 만든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마음을 잠기고 생각을 쌓아 넉넉히 함양하여 스스로 얻게 해야 한다. 지금 하루에 다 설명해 버리면 다만 야박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한(漢)나라 때의 설명에 이르러서는, 휘장을 내리고 강송(講誦)하면서도 오히려 반드시 글을 (다) 설명하지는 않았다.
15. 옛적에는 여덟 살에 소학(小學)에 들고 열다섯에 대학(大學)에 들었다. 그 재질이 가르칠 만한 자를 가려 모으고, 불초한 자는 농토로 돌려보냈다. 대개 선비와 농부가 업을 바꾸지 않으니, 이미 학교에 들면 농사를 다스리지 않은 뒤에야 선비와 농부가 갈린다. 학교에 있을 때의 봉양은, 사대부의 자식이면 봉양이 없음을 염려하지 않거니와, 비록 서인(庶人)의 자식이라도 이미 학교에 들면 또한 반드시 봉양이 있었다. 옛적의 선비는 열다섯에 학교에 들어 마흔이 되어서야 벼슬하니, 중간에 절로 이십오 년의 배움이 있고 또 좇을 이익이 없으니 그 뜻한 바를 알 수 있다. 모름지기 선을 좇아 곧 이로부터 덕을 이루었다. 후세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급급히 이익을 좇는 뜻이 있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선으로 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이 반드시 마흔에 벼슬하게 한 뒤에야 뜻이 정해졌다. 다만 옷과 밥을 경영하는 것은 도리어 해가 없으나, 오직 이록(利祿)의 유혹이 가장 사람을 해친다.
16. 천하에 얼마나 많은 인재가 있는가마는, 다만 도가 천하에 밝지 못하므로 성취하는 바가 있지 못하다. 또 옛적에는 "시(詩)에서 흥기하고, 예(禮)에서 서며, 악(樂)에서 이루었다." 지금 사람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옛사람의 시는 지금 사람의 가곡과 한가지이다. 비록 마을의 어린아이라도 모두 그 말을 익히 듣고 그 뜻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시에서 흥기할 수 있었다. 후세에는 노사(老師)와 숙유(宿儒)도 오히려 그 뜻을 깨닫지 못하니, 어찌 배우는 자를 책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시에서 흥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옛 예가 이미 폐하여 인륜이 밝지 못하니, 집안을 다스림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도가 없다. 이는 예에서 서지 못하는 것이다. 옛사람은 노래로 그 성정(性情)을 기르고, 소리로 그 이목(耳目)을 기르며, 춤으로 그 혈맥(血脈)을 기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다. 이는 악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옛적에는 인재 이룸이 쉬웠고 지금은 인재 이룸이 어렵다.
17. 공자가 사람을 가르침에,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펴 주지 않았다. 대개 분발하고 애태우기를 기다리지 않고 펴 주면 앎이 견고하지 못하고, 분발하고 애태움을 기다린 뒤에 펴 주면 (앎이) 넘쳐흐른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깊이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도 얻지 못한 뒤에 그를 위해 말해 주면 좋다. 초학자는 모름지기 우선 그를 위해 말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단 그가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의 묻기 좋아하는 마음을 그치게 한다.
18. 횡거 선생이 말하였다. "공경하고 절제하며 물러나고 사양하여 예를 밝힘"은 인(仁)의 지극함이요 도를 사랑함의 극치이다. 자기가 힘써 밝히지 않으면 사람이 본받을 데가 없고 도가 넓혀질 데가 없으며 가르침이 이루어질 데가 없다.
19. 〈학기(學記)〉에 이르기를, "나아가게 하되 그 편안함을 돌아보지 않고, 사람을 부리되 그 정성을 말미암지 않으며, 사람을 가르치되 그 재질을 다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직 편안하지 못한데 또 나아가게 하고, 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또 일러주면, 한갓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마디(節目, 걸림돌)를 생기게 한다. 재질을 다하지 않고 편안함을 돌아보지 않으며 정성을 말미암지 않음은 모두 베풂의 망령됨이다. 사람을 가르침은 지극히 어렵다. 반드시 사람의 재질을 다해야 사람을 그르치지 않는다. 미칠 만한 곳을 본 뒤에 일러주니, 성인의 가르침은 마치 포정(庖丁)이 소를 해부하는 것과 같아, 모두 그 틈을 알아 칼을 남는 자리에 넣어 온전한 소가 없다. 사람의 재질이 일을 할 만하나 다만 그 정성을 말미암지 않으면 그 재질을 다하지 못한다. 만약 억지로 힘써 한다면 어찌 정성을 말미암음이 있겠는가?
20. 옛적의 어린아이는 곧 능히 일을 공경히 하였다. 어른이 더불어 이끌면 두 손으로 어른의 손을 받들었고, 물으면 입을 가리고 대답하였다. 대개 조금이라도 일을 공경하지 않으면 곧 충신(忠信)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를 가르침에 우선 안상(安詳)함과 공경함을 먼저 한다.
21.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을 (책망함에) 더불어 따질 것이 못 되고 정사를 더불어 흠잡을 것이 못 되니, 오직 대인(大人)만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을 수 있다." 비단 임금의 마음만이 아니라 벗들과 배우는 자 사이에 이르러서도, 저들이 비록 의론이 다르더라도 깊이 따지려 하지 말고, 오직 그 마음을 정리하여 바름으로 돌아가게 하면 어찌 작은 보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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