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 03 치지(致知)
권3 「치지(致知)」는 모두 78조로, 앎을 지극히 함을 논한다. 앎이 지극한 뒤에야 행할 수 있다. 첫머리부터 22조까지는 치지의 방법을 총론하고, 치지는 독서보다 큼이 없으므로 23조부터 33조까지는 독서의 법을 총론하며, 34조 이후는 독서의 법을 나누어 논하되 책의 선후로 차례를 삼는다. 《대학》에서 시작하여 《논어》·《맹자》·《시경》·《서경》, 그리고 《중용》·《주역》·《춘추》와 사서(史書)로 이어진다.
번역
치지(致知) (주: 모두 78조이다.)
이 권은 치지를 논한다. 앎이 지극한 뒤에야 행할 수 있다. 첫 단락부터 22단까지는 치지의 방법을 총론한다. 그러나 치지는 독서보다 큼이 없으니 23단부터 33단까지는 독서의 법을 총론하고, 34단 이후는 곧 독서의 법을 나누어 논하되 책의 선후로 차례를 삼는다. 《대학》에서 시작하여 학문의 규모와 차례를 알게 하고 뒤에 《논어》·《맹자》·《시경》·《서경》으로 잇는다. 의리가 속에 충족하면 큰 근본 한 근원의 묘함을 더듬을 수 있으므로 《중용》으로 잇는다. 본원에 통달하면 '신묘함을 궁구하고 화함을 앎[窮神知化]'을 할 수 있으므로 《주역》으로 잇는다. 이치가 밝고 의가 정밀하여 조화의 깊음에 통달하면 성인의 큰 쓰임을 알 수 있으므로 《춘추》로 잇는다. 《춘추》의 쓰임에 밝으면 미루어 사서를 보아 그 시비득실의 이치를 분별할 수 있다. 횡거의 《역설(易說)》 이하는 곧 어록의 차례를 따르되 《주관(周官)》의 뜻이 이로 인해 갖추어진다.
1. 이천 선생이 주장문에게 답한 편지에 말하였다. 마음이 도에 통한 뒤에야 시비를 분별할 수 있으니, 마치 저울을 잡아 경중을 견주는 것과 같다. 맹자가 이른바 '말을 앎[知言]'이 이것이다. 마음이 도에 통하지 않고 옛사람의 시비를 견줌은, 저울을 잡지 않고 경중을 헤아림과 같다. 그 눈의 힘을 다하고 그 마음의 지혜를 수고로이 하여 비록 때로 맞아도 또한 옛사람이 이른바 '억측하여 자주 맞음'이다. 군자는 귀히 여기지 않는다.
2. 이천 선생이 문인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공·맹의 문하가 어찌 모두 현철(賢哲)이었겠는가? 본래 보통 사람이 많았다. 보통 사람으로 성현을 보면 알지 못하는 자가 많다. 오직 감히 자기를 믿지 않고 그 스승을 믿었으니, 그러므로 구한 뒤에 얻었다. 이제 여러분은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곧 버려 두고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끝내 다르다. 곧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다시 우선 생각함, 이것이 치지의 방법이다.
3. 이천 선생이 횡거 선생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논한 바가 대개 고심하고 힘을 다한 상(象)은 있으나 너그럽고 온후한 기상이 없습니다. 밝은 지혜로 비춘 바가 아니라 고색(考索)하여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자주 치우치고 말이 많이 막혀 작은 출입(出入)이 때로 있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사려를 온전히 길러 의리에 무젖으면, 후일에 절로 마땅히 통창(通暢)할 것입니다.
4. 얻음과 얻지 못함을 알려면 심기(心氣) 위에서 징험한다. 사려에 얻음이 있어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며 넉넉함이 있는 것이 실제 얻음이요, 사려에 얻음이 있으나 심기가 수고롭고 소모된 것은 실제 얻지 못하고 억지로 헤아린 것이다. 일찍이 어떤 이가 '근래 도를 배워 사려하다가 마음이 허해졌다'고 하기에 말하였다. 사람의 혈기(血氣)는 본래 허실(虛實)이 있고, 질병이 옴은 성현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성현이 배움으로 인해 심질(心疾)에 이르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5. 오늘날 귀괴(鬼怪)와 이설(異說)을 마구 믿는 자는 다만 먼저 이치를 밝히지 못함이다. 만약 일마다 일일이 이회하면 어찌 다할 기약이 있겠는가? 모름지기 다만 배움에서 이회해야 한다.
6. 배움은 생각[思]에서 근원한다.
7. 이른바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이름[日月至焉]'과 오래도록 쉬지 않는 자는, 보는 바의 규모가 비록 대략 서로 비슷하나 그 의미와 기상이 아주 다르다. 모름지기 마음을 가라앉혀 묵묵히 알고 음미하여 오래 하면 거의 자득할 것이다. 배우는 자가 성인을 배우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배우려면 모름지기 성인의 기상을 익숙히 음미해야 한다. 다만 이름 위에서 이회해서는 안 된다. 이같이 하면 다만 문자를 강론함일 뿐이다.
8. 물었다. 충신으로 덕에 나아가는 일은 본래 힘쓸 수 있으나 치지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배우는 자는 본래 힘써야 하나, 모름지기 안 뒤에야 행할 수 있다. 만약 알지 못하고 다만 요(堯)임금을 엿보아 그 행사를 배운다면, 요임금의 그 많은 총명예지(聰明睿智)가 없으니 어찌 그처럼 행동거지가 예에 맞을 수 있겠는가? 그대 말과 같음은 독실히 믿어 굳게 지킴이지 본래 가진 것이 아니다. 치지하지 않고 성의(誠意)하려 함은 등급을 건너뜀이다. 억지로 행하는 자가 어찌 오래 지속할 수 있겠는가? 이치를 밝게 비춤이 아니면 자연히 이치를 즐겨 따를 수 없다. 성(性)은 본래 선하다. 이치를 따라 행함은 이치에 순응하는 일이다. 본래 또한 어렵지 않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하여 곧 안배하므로 어렵다 한다. 앎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자못 깊고 얕음이 있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참으로 알아야[眞知] 비로소 옳음을 알면 곧 태연히 행해 나간다. 내가 스무 살 때 경의(經義)를 해석함이 지금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생각건대 오늘날 깨달은 의미는 젊은 때와 절로 다르다.
9. 무릇 한 사물 위에 하나의 이치가 있다. 모름지기 그 이치를 궁구하여 다해야 한다. 이치를 궁구함도 여러 갈래이니, 혹 책을 읽어 의리를 강명(講明)하고, 혹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며, 혹 사물을 응접하여 마땅하게 처리함이 모두 궁리(窮理)이다. 어떤 이가 물었다. 격물(格物)은 사물마다 궁구해야 합니까, 아니면 다만 한 사물을 궁구하면 온갖 이치를 모두 압니까? 답하였다. 어찌 곧 관통(貫通)하겠는가? 만약 다만 한 사물을 궁구하여 곧 뭇 이치에 통한다면 비록 안자라도 감히 이같이 말하지 못한다. 모름지기 오늘 한 가지를 궁구하고 내일 또 한 가지를 궁구하여, 쌓고 익힘이 이미 많아진 뒤에 훌쩍 절로 관통하는 곳이 있다.
10. 생각하면 슬기로워진다[思曰睿]. 사려가 오랜 뒤에 슬기가 자연히 생긴다. 만약 한 가지 일에서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우선 다른 일로 바꾸어 생각하라. 오로지 이 한 가지 일만 지켜서는 안 된다. 대개 사람의 지식이 여기서 가린다. 비록 억지로 생각하여도 통하지 않는다.
11. 물었다. 사람이 배움에 뜻이 있으나 지식이 가려 막히고 역량이 이르지 못하면 어찌합니까? 답하였다. 다만 치지할 뿐이다. 만약 지식이 밝으면 역량이 절로 나아간다.
12. 물었다. 사물을 관찰하여 자기를 살핌은 도리어 사물을 봄으로 인해 몸에 돌이켜 구함입니까? 답하였다. 반드시 이같이 말할 것은 없다. 사물과 내가 한 이치이니, 막 저를 밝히면 곧 이를 깨닫는다. 이것이 안과 밖을 합하는 도이다. 또 물었다. 치지는 먼저 사단(四端)에서 구함이 어떻습니까? 답하였다. 정성(情性)에서 구함은 본래 몸에 절실하다. 그러나 한 풀 한 나무도 모두 이치가 있으니 모름지기 살펴야 한다.
13.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움이 성(聖)을 이룬다.' 생각을 다함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으니, 처음에는 흐린 물이 있다가 오랜 뒤에 점차 맑은 것을 끌어내게 된다. 사람의 사려도 처음에는 모두 혼탁하나 오래면 절로 명쾌(明快)해진다.
14. 물었다. 무엇이 '가까이 생각함[近思]'입니까? 답하였다. 유추(類推)함이다.
15. 배우는 자는 먼저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
16. 횡거 선생이 범손지에게 답하였다. 물어 온 바 물괴신간(物怪神姦)은 말하기 어렵지 않으나, 다만 말하여도 반드시 믿지는 않을 것이오. 맹자가 논한 '성을 알고 하늘을 앎[知性知天]', 배움이 하늘을 앎에 이르면 사물의 나온 바가 마땅히 원원(源源)히 절로 보일 것이오. 나온 바를 알면 사물의 마땅히 있어야 함과 없어야 함이 마음에 깨닫지 못함이 없어, 또한 말을 기다린 뒤에 알 것이 아니오. 여러분이 논한 바는 다만 지켜 잃지 않고 이단(異端)에 협박당하지 않아 나아가고 또 나아가 그치지 않으면, 곧 물괴는 분별할 것 없고 이단은 공격할 것 없어 일 년이 안 되어 우리 도가 이길 것이오. 만약 무궁한 데 맡기고 알 수 없는 데 부치면, 배움이 의심으로 흔들리고 앎이 사물로 어두워져, 번갈아 와 틈이 없으면 마침내 스스로 보존할 수 없어 괴망(怪妄)에 빠짐이 틀림없소.
17. 자공(子貢)이 '부자(夫子)의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심은 들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미 부자의 말씀이라 하였으면 곧 늘 말씀하신 것이다. 성문(聖門)의 배우는 자는 '인을 자기 임무로 삼아' 구차히 앎을 얻음으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깨달음[了悟]으로 들음을 삼았으므로 이 말이 있었다.
18. 의리(義理)의 학은 또한 모름지기 깊이 가라앉혀야 비로소 나아감이 있으니, 얕고 가벼이 떠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 배움이 사리(事理)를 미루어 궁구하지 못함은 다만 마음이 거칠어서이다. 안자가 성인에 이르지 못한 곳 같음도 오히려 마음이 거칢이다.
20. '글을 널리 배움'은 다만 '험함을 익혀 마음이 형통함[習坎心亨]'을 얻으려 함이다. 대개 사람이 험조(險阻)와 간난(艱難)을 겪은 뒤에야 그 마음이 형통한다.
21. 의리에 의심이 있으면 옛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새 뜻을 오게 한다. 마음속에 열리는 바가 있으면 곧 차기(劄記, 메모)하라. 생각하지 않으면 도리어 막힌다. 다시 모름지기 벗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하루 사이에 벗과 논하면 하루 사이에 뜻이 달라진다. 모름지기 날마다 이같이 강론하면 오래되어 절로 나아감을 깨닫는다.
22. 무릇 생각을 다하여 말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살펴 생각하고 밝게 분별함이 곧 잘 배움이 된다. 고자(告子) 같은 자는 말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마침내 그쳐 다시 구하지 않았다.
23.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무릇 문자를 봄에 먼저 모름지기 그 문의(文義)를 밝힌 뒤에 그 뜻을 구할 수 있다. 문의를 밝히지 못하고 뜻을 본 자는 없다.
24. 배우는 자는 자득(自得)해야 한다. 《육경(六經)》이 넓고 아득하여 갑자기 다 밝히기 어렵다. 우선 길을 본 뒤에 각자 하나의 문정(門庭)을 세워 돌아가 구하면 된다.
25. 무릇 문자를 풀이함은 다만 그 마음을 평이하게 하면 절로 이치를 본다. 이치는 다만 인리(人理, 사람의 이치)라 매우 분명하니 한 가닥 평탄한 길과 같다. 《시경》에 '주나라 길이 숫돌 같고 그 곧음이 화살 같다'고 함이 이를 이른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성인의 말씀은 천근(淺近)하게 보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답하였다. 성인의 말씀은 절로 가까운 곳도 있고 절로 깊고 먼 곳도 있다. 가까운 곳을 어찌 억지로 천착하여 깊고 멀게 가르치겠는가? 양자(揚子)가 '성인의 말씀은 멀기가 하늘 같고 현인의 말씀은 가깝기가 땅 같다'고 하였는데, 나(이천)는 고쳐서 '성인의 말씀은 그 멂이 하늘 같고 그 가까움이 땅 같다'고 하겠다.
26. 배우는 자가 문의에 얽매이지 않는 자는 또 전혀 등져 멀리 가 버리고, 문의를 이회하는 자는 또 막혀 통하지 못한다. 자탁유자(子濯孺子)가 장수가 된 일 같은 것을 맹자는 다만 그 스승을 배반하지 않은 뜻만 취하였으나, 사람은 모름지기 그 위에서 임금 섬기는 도가 어떠한가를 이회해야 한다. 또 만장(萬章)이 순임금의 곳간 손질과 우물 침의 일을 물음 같은 것을 맹자는 다만 그 대의(大意)만 답하였으나, 사람은 모름지기 우물 침에서 어떻게 나오고 곳간 손질에서 또 어떻게 내려오는지를 이회하려 한다. 이같은 배움은 한갓 심력(心力)을 허비함이다.
27. 무릇 책을 봄에 유사한 것으로 그 뜻을 얽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글자마다 서로 막힌다. 마땅히 그 문세(文勢)와 상하의 뜻을 보아야 하니, 가령 '채워 실함을 미(美)라 한다'의 미는 《시경》의 미와 다르다.
28. 물었다. 형중(瑩中)이 일찍이 문중자(文中子)의 '혹 역(易) 배움을 묻자,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면 된다」고 한 말이 가장 극진하다. 문왕이 성인인 까닭도 다만 하나의 그치지 않음[不已]이다'라는 말을 사랑하였습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무릇 경의(經義)를 말함을 다만 마디마디 미루어 올라가면 다할 줄 안다. 무릇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씀'은 역을 다하지 못한다. 이 한 구절에 의거하면 다만 구삼(九三)에만 쓸 뿐이다. 만약 '부지런히 힘씀'이 '그치지 않음'이요 '그치지 않음'이 또 도(道)라 하여 점점 미루어 가면 자연히 다하나, 다만 이치는 이같지 않다.
29. 공자가 냇가에서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으니, 도(道)의 본체가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모름지기 스스로 보아 얻어야 한다. 장역(張繹)이 말하였다. 이것이 곧 무궁함입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본래 도는 무궁하다. 그러나 어찌 하나의 무궁함으로 곧 그것을 다 말하겠는가?
30. 지금 사람은 책 읽을 줄 모른다. 가령 '시 삼백 편을 외워도 정사를 맡기면 통달하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 가서 혼자 응대하지 못하면 비록 많은들 또한 무엇하겠는가?'라고 함은, 모름지기 시를 읽기 전에는 정사에 통달하지 못하고 혼자 응대하지 못하다가 시를 읽은 뒤에 곧 정사에 통달하고 사방에 혼자 응대하게 되어야 비로소 시를 읽음이다. '사람으로서 주남(周南)·소남(召南)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 같다'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시를 읽기 전에는 담장을 마주한 듯하다가 읽은 뒤에 곧 담장을 마주하지 않아야 비로소 징험이 있다. 대저 책 읽음은 다만 이것이 법이다. 가령 《논어》를 읽음에 옛날 읽지 않았을 때 이 사람이었는데 읽은 뒤에도 또 다만 이 사람이면 곧 일찍이 읽지 않은 것이다.
31. 무릇 문자를 봄에, 칠 년의 일이나 한 세대 백 년의 일 같은 것을 모두 마땅히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곧 유익하다.
32. 무릇 경(經)을 풀이함이 같지 않음은 해롭지 않으나, 다만 긴요한 곳은 같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33. 윤순(尹淳)이 처음 와서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다. 선생이 말하였다. 그대는 학문에는 모름지기 책을 읽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책은 반드시 많이 볼 것이 아니라 그 요체를 알아야 한다. 많이 보되 요체를 알지 못하면 책방[書肆]일 뿐이다. 나는 젊은 때 책 읽음에 많음을 탐하여 지금은 많이 잊었다. 모름지기 성인의 말씀을 음미하여 마음에 들이고 기억한 뒤에 힘써 행하면 절로 얻는 바가 있다.
34. 처음 배워 덕에 드는 문은 《대학》만 한 것이 없다. 그 밖은 《논어》·《맹자》만 한 것이 없다.
35. 배우는 자는 먼저 모름지기 《논어》·《맹자》를 읽어야 한다. 《논어》·《맹자》를 궁구하면 절로 요약한 곳이 있다. 이로써 다른 경을 보면 매우 힘이 덜 든다. 《논어》·《맹자》는 자[丈尺]와 저울 같다. 이로써 사물을 헤아리면 자연히 장단(長短)과 경중(輕重)을 본다.
36. 《논어》를 읽는 자는 다만 여러 제자가 물은 곳을 자기 물음으로 삼고, 성인이 답한 곳을 오늘 귀로 들음으로 삼으면 자연히 얻음이 있다. 만약 능히 《논어》·《맹자》에서 깊이 구하고 음미하여 함양(涵養)해 이루면 매우 좋은 기질이 생긴다.
37. 무릇 《논어》·《맹자》를 봄에 모름지기 익숙히 읽고 음미하여 성인의 말씀을 자기에게 절실히 해야 한다. 다만 한바탕 말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람이 다만 이 두 책을 자기에게 절실하게 보면 종신토록 자못 많을 것이다.
38. 《논어》는 읽은 뒤에 전혀 아무 일 없는 자가 있고,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구절을 얻어 기뻐하는 자가 있으며, 읽은 뒤에 좋아할 줄 아는 자가 있고, 읽은 뒤에 손이 춤추고 발이 구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
39. 배우는 자는 마땅히 《논어》·《맹자》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논어》·《맹자》를 이미 다스리면 《육경》은 다스리지 않아도 밝아진다. 책 읽는 자는 마땅히 성인이 경(經)을 지은 뜻과 성인이 마음 쓴 바와 성인이 성인에 이른 까닭과, 내가 이르지 못한 까닭, 얻지 못한 까닭을 구절구절 구하여, 낮에 외고 음미하며 한밤에 생각하여, 그 마음을 평이하게 하고 그 기를 화평히 하며 그 의심을 비워 두어야 한다. 그러면 성인의 뜻이 보인다.
40. 《논어》·《맹자》를 읽고도 도를 알지 못하면, 이른바 '비록 많은들 또한 무엇하겠는가?'이다.
41. 《논어》·《맹자》는 다만 거듭 읽으면 곧 절로 뜻이 족하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음미해야 한다. 만약 언어로 풀이하면 뜻이 곧 부족하다.
42. 물었다. 우선 《논어》·《맹자》의 긴요한 곳을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천이 말하였다. 본래 좋으나, 만약 얻음이 있어도 끝내 흡족하지 못하다. 대개 우리 도는 석씨(釋氏)가 한번 보고 곧 공적(空寂)으로 가 버림과 같지 않다.
43. '시(詩)에서 흥기(興起)함'이란, 성정(性情)을 읊조리고 도덕의 가운데 무젖어 흠동(歆動, 감발)됨이니, '나는 증점(曾點)과 함께하겠다'는 기상이 있다.
44. 사현도가 말하였다. 명도 선생은 시를 잘 말씀하셨다. 그는 또 전혀 장구(章句)로 해석하지 않고 다만 넉넉히 음미하고 위아래로 읊조려, 곧 사람으로 하여금 얻는 곳이 있게 하였다. '저 일월을 보매 아득히 나의 생각이라. 길이 멂이여, 어찌 능히 오겠는가?' 생각이 간절하다. 끝에 '모든 군자여! 덕행을 알지 못하는도다. 해치지 않고 탐하지 않으면 어찌 쓰여 선하지 않으랴?' 바름으로 돌아간다.
45. 명도 선생이 말하였다. 배우는 자는 시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시를 보면 곧 사람으로 하여금 한 격(格)이 자라게 한다.
46. '글로 말[辭]을 해치지 않는다.' 문(文)은 문자의 문이다. 한 글자를 들면 곧 문이요, 구를 이루면 사(辭)이다. 시는 한 글자 풀이로 행하지 못하면 도리어 그에 맞춘다. 가령 '주(周)나라가 드러나지 않으랴' 같은 것은 절로 글을 지음이 마땅히 이러해서이다.
47. 책을 봄에 모름지기 이제(二帝)·삼왕(三王)의 도를 보아야 하니, 이전(二典) 같은 것은 곧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까닭과 순임금이 임금을 섬긴 까닭을 구해야 한다.
48. 《중용》이란 책은 공문(孔門)에서 전수하여 자사(子思)·맹자에게 이루어졌다. 그 책이 비록 잡다하게 기록되었으나 다시 정조(精粗)를 나누지 않고 한꺼번에 말하였다. 지금 사람이 도를 말함은 흔히 높음을 말하면 곧 낮음을 빠뜨리고, 근본을 말하면 곧 말단을 빠뜨린다.
49. 이천 선생의 《역전(易傳)·서(序)》에 말하였다. 역(易)은 변이(變異)이다. 때를 따라 변이하여 도를 좇는다. 그 책됨이 광대(廣大)하게 모두 갖추어졌다. 장차 성명(性命)의 이치를 따르고 유명(幽明)의 까닭을 통하며 사물의 정(情)을 다하여 개물성무(開物成務)의 도를 보이려 한 것이다. 성인이 후세를 근심함이 지극하다 할 만하다. 옛날이 비록 멀어도 남은 경(經)이 아직 있다. 그러나 앞선 유자는 뜻을 잃고 말을 전하였고 후학은 말을 외고 뜻을 잊었다. 진(秦)나라 이후로 대개 전함이 없었다. 내가 천 년 뒤에 나서 이 글의 인몰(湮沒)을 슬퍼하여, 장차 후인으로 하여금 흐름을 따라 근원을 구하게 하려 하니, 이 전(傳)을 짓는 까닭이다. '역에 성인의 도 네 가지가 있으니, 말로 하는 자는 그 사(辭)를 숭상하고, 움직이는 자는 그 변(變)을 숭상하며, 그릇을 만드는 자는 그 상(象)을 숭상하고, 복서(卜筮)하는 자는 그 점(占)을 숭상한다.' 길흉(吉凶)·소장(消長)의 이치와 진퇴(進退)·존망(存亡)의 도가 사(辭)에 갖추어졌다. 사를 미루어 괘(卦)를 살피면 변을 알 수 있고 상과 점이 그 가운데 있다. '군자는 거하면 그 상을 보아 그 사를 음미하고, 움직이면 그 변을 보아 그 점을 음미한다.' 사를 얻어 그 뜻에 통달하지 못하는 자는 있으나, 사를 얻지 못하고 그 뜻에 통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지극히 미세한 것은 이(理)요 지극히 드러난 것은 상(象)이다. 체용(體用)이 한 근원이요 현미(顯微)에 틈이 없다. '회통(會通)을 보아 그 전례(典禮)를 행하면' 사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잘 배우는 자는 말을 구함을 반드시 가까운 데서 한다. 가까운 데서 쉽게 하는 자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내가 전한 것은 사이다. 사로 말미암아 뜻을 얻음은 곧 사람에게 달렸다.
50. 이천 선생이 장굉중(張閎中)에게 답한 편지에 말하였다. 《역전》을 아직 전하지 않음은, 스스로 정력(精力)이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헤아려 조금 더 나아짐이 있기를 바라서이다. 보내온 편지에 '역의 뜻이 본래 수(數)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으나, 뜻이 수에서 일어난다 함은 그르다. 이(理)가 있은 뒤에 상(象)이 있고 상이 있은 뒤에 수가 있다. 역은 상으로 인해 이를 밝히고 상으로 말미암아 수를 안다. 그 뜻을 얻으면 상과 수가 그 가운데 있다. 반드시 상의 은미함을 궁구하고 수의 털끝까지 다하려 함은 곧 흐름을 찾고 말단을 좇음이다. 술가(術家)가 숭상하는 바요 유자(儒者)가 힘쓸 바가 아니다.
51. 때를 알고 형세를 앎이 역을 배우는 큰 방법이다.
52. 대축괘(大畜卦) 초이(初二)는 건(乾)의 체가 강건하나 나아가기에 부족하고, 사오(四五)는 음유(陰柔)하나 능히 그친다. 때의 성쇠(盛衰)와 형세의 강약(強弱)은 역을 배우는 자가 마땅히 깊이 알아야 할 바이다.
53. 여러 괘의 이오(二五)는 비록 자리에 마땅하지 않아도 흔히 중(中)으로 아름다움을 삼고, 삼사(三四)는 비록 자리에 마땅해도 혹 부중(不中)으로 허물을 삼는다. 중이 늘 정(正)보다 무겁다. 대개 중이면 정에 어긋나지 않으나 정이 반드시 중은 아니다. 천하의 이치는 중보다 선함이 없으니, 구이(九二)·육오(六五)에서 볼 수 있다.
54. 물었다. 호 선생(호원)이 구사(九四)를 태자(太子)로 풀이함은 괘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또한 무방하다. 다만 어떻게 쓰는가를 볼 뿐이다. 저이(儲貳, 세자)에 해당하면 저이로 쓰면 된다. 구사는 임금에 가까우니 곧 저이로 삼아도 해롭지 않다. 다만 하나에 구애되려 하지 말라. 만약 한 가지 일에 고집하면 삼백팔십사 효가 다만 삼백팔십사 가지 일만 짓고 만다.
55. 역을 봄에 우선 때를 알아야 한다. 무릇 여섯 효는 사람마다 쓰임이 있다. 성인은 절로 성인의 쓰임이 있고, 현인은 절로 현인의 쓰임이 있으며, 보통 사람은 절로 보통 사람의 쓰임이 있고, 배우는 자는 절로 배우는 자의 쓰임이 있다. 임금에겐 임금의 쓰임이 있고 신하에겐 신하의 쓰임이 있어 통하지 않음이 없다. 이로 인해 곤괘(坤卦)는 신하의 일인데 임금에게 쓸 곳이 있는가를 물었다. 선생이 말하였다. 어찌 쓸 데가 없겠는가?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 같은 것을 임금이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56. 역 가운데는 다만 반복(反復)·왕래(往來)·상하(上下)를 말할 뿐이다.
57. 역을 지음은 천지(天地)와 유명(幽明)에서 곤충(昆蟲)·초목(草木)의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합하지 않음이 없다.
58. 요즘 사람이 역을 봄에 모두 역이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위에서 천착한다. 만약 익게 외지 못하면, 위에 한 덕(德)을 더해도 많음을 깨닫지 못하고 한 덕을 덜어도 적음을 깨닫지 못한다. 비유하면 이 걸상을 알지 못하면 다리 하나를 덜어도 적음을 모르고 하나를 더해도 많음을 모르는 것과 같다. 만약 알면 절로 더하고 덜 수 없다.
59. 유정부(遊定夫)가 이천에게 '음양을 헤아릴 수 없음을 신(神)이라 한다'를 물었다. 이천이 말하였다. 그대는 의심하여 묻는가, 어려운 것을 가려 묻는가?
60. 이천이 《역전》을 문인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다만 칠 푼을 말했을 뿐이니 후인이 다시 모름지기 스스로 체구(體究)해야 한다.
61. 이천 선생의 《춘추전(春秋傳)·서(序)》에 말하였다. 하늘이 백성을 냄에 반드시 무리에서 빼어난 재주가 있어 일어나 임금 노릇 한다. 다스려 다툼이 그치고, 인도하여 생양(生養)이 이루어지며, 가르쳐 윤리(倫理)가 밝아진다. 그런 뒤에 인도(人道)가 서고 천도(天道)가 이루어지며 지도(地道)가 평안해진다. 이제(二帝) 이상은 성현이 대대로 나와 때를 따라 일어났다. 풍기(風氣)의 마땅함에 순응하여 하늘에 앞서 사람을 열지 않고 각기 때를 따라 정사를 세웠다. 삼왕(三王)이 갈마들어 일어나 삼중(三重)이 갖추어지매, 자·축·인(子丑寅)의 정월을 세움과 충·질·문(忠質文)의 숭상을 바꿈으로 인도가 갖추어지고 천운(天運)이 두루 하였다. 성왕(聖王)이 다시 나오지 않으매 천하를 가진 자가 옛 자취를 모방하려 하나 또한 사의(私意)로 망령되이 함일 뿐이니, 어찌 다시 선왕의 도를 알겠는가? 부자(공자)가 주(周)나라 말기에, 성인이 다시 나오지 않고 하늘에 순응하고 때에 응하는 다스림이 다시 있지 않으매, 이에 《춘추》를 지어 백왕(百王)이 바꾸지 못할 큰 법으로 삼았다. 이른바 '삼왕에 상고하여도 어긋나지 않고,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 없고,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 것이다. 후세가 사서(史書)로 춘추를 보아 선을 기리고 악을 폄(貶)할 뿐이라 하나, 경세(經世)의 큰 법에 이르러서는 알지 못한다. 춘추의 대의(大義) 수십은 그 뜻이 비록 커도 해와 별처럼 밝아 쉽게 보이나, 오직 그 은미한 말과 숨은 뜻, 때에 따라 마땅함을 취한 것이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춘추》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넉넉히 음미하고 묵묵히 알아 마음으로 통한 뒤에야 그 미묘함에 나아갈 수 있다. 후왕(後王)이 《춘추》의 뜻을 알면 비록 덕이 우탕(禹湯)이 아니라도 오히려 삼대(三代)의 다스림을 본받을 수 있다. 진(秦)나라 이후로 그 학이 전하지 않았다. 내가 성인의 뜻이 후세에 밝지 못함을 슬퍼하여 전을 지어 밝히니, 후인으로 하여금 그 글에 통하여 그 뜻을 구하고 그 뜻을 얻어 그 쓰임을 본받게 하면 삼대를 회복할 수 있다.
62. 《시경》·《서경》은 도를 싣는 글이요, 《춘추》는 성인의 쓰임이다. 시·서는 약방문(藥方) 같고 춘추는 약을 써서 병을 다스림 같다. 성인의 쓰임이 전부 이 책에 있으니, 이른바 '행사(行事)에 실어 깊고 절실히 드러냄만 못하다'는 것이다.
63. 《오경(五經)》에 《춘추》가 있음은 법률에 단례(斷例)가 있음과 같다. 율령(律令)은 오직 그 법을 말하나 단례에 이르러 비로소 그 법의 쓰임이 보인다.
64. 《춘추》를 배움도 좋다. 한 구절이 한 가지 일이라 시비가 곧 여기서 보인다. 이도 궁리(窮理)의 요체이다. 그러나 다른 경도 어찌 궁리할 수 없겠는가? 다만 다른 경은 그 뜻을 논하고 《춘추》는 그 행사로 인해 시비가 비교적 드러나므로 궁리가 요체가 된다. 일찍이 배우는 자에게 말하기를, 우선 먼저 《논어》·《맹자》를 읽고 다시 한 경을 읽은 뒤에 《춘추》를 보라 하였다. 먼저 의리를 안 뒤에 《춘추》를 볼 수 있다. 《춘추》는 무엇으로 준칙을 삼는가? 《중용》만 한 것이 없다. 《중용》을 알려면 권도(權)만 한 것이 없다. 모름지기 때맞춰 중(中)을 해야 한다.
65. 《춘추》는 전(傳)이 안(按)이 되고 경(經)이 단(斷)이 된다.
66. 무릇 사서(史書)를 읽음은 한갓 사적(事迹)을 기억하려 함이 아니라, 모름지기 그 치란(治亂)·안위(安危)·흥폐(興廢)·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가령 《고제기(高帝紀)》를 읽으면 곧 모름지기 한(漢)나라 사백 년의 처음과 끝, 치란이 어떠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것도 배움이다.
67. 선생(이천)은 매양 사서를 읽다가 절반에 이르면 책을 덮고 그 성패(成敗)를 헤아린 뒤에 도리어 보았다.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면 다시 더 정밀히 생각하였다. 그 사이에 다행히 이루어지고 불행히 패한 것이 많다. 지금 사람은 다만 이룬 자를 보고 옳다 하고 패한 자를 그르다 하나, 이룬 자가 자못 옳지 않음이 있고 패한 자가 자못 옳음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68. 사서를 읽어 모름지기 성현이 둔 치란의 기틀, 현인 군자의 출처(出處)와 진퇴(進退)를 봄이 곧 격물(格物)이다.
69. 원우(元祐) 연간에 어떤 객(客)이 이천을 뵈었는데, 책상 사이에 다른 책이 없고 오직 인쇄된 《당감(唐鑑)》 한 부만 있었다. 선생이 말하였다. 근래 비로소 이 책을 보았다. 삼대 이후로 이런 의론이 없다.
70. 횡거 선생이 말하였다. 「서괘(序卦)」를 성인의 심오함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제 한 물건을 안치(安置)하려 해도 오히려 살펴 처리하기를 구하거늘, 하물며 성인이 역에 있어 그 사이에 비록 지극히 정밀한 뜻은 없어도 대개 다 의미가 있다. 성인의 글을 봄에 모름지기 두루 펴고 세밀하기가 이와 같아야 한다. 큰 목수를 어찌 도끼 하나로 알 수 있겠는가.
71. 천관(天官)의 직(職)은 모름지기 흉금(襟懷)이 넓고 커야 비로소 볼 수 있다. 대개 그 규모가 지극히 크니, 만약 이 마음을 얻지 못하고 일마다 곡진히 궁구하여 이 마음에 이같이 큰 것을 모으려 하면 반드시 얻지 못한다.
72. 옛사람 중 시를 안 자는 오직 맹자이니, 뜻으로 뜻을 거슬렀기[以意逆志] 때문이다. 무릇 시인의 뜻은 지극히 평이하니 굳이 간험(艱險)하게 구할 것이 없다. 지금 간험하게 시를 구하면 이미 그 본심을 잃은 것이니, 어찌 시인의 뜻을 보겠는가?
73. 《상서(尙書)》는 보기 어려우니, 대개 흉억(胸臆)이 이같이 큼을 얻기 어렵다. 다만 뜻만 풀이하려 하면 어려움이 없다.
74. 책 읽음이 적으면 정의(精義)를 상고하여 얻을 까닭이 없다. 대개 책은 이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라, 한때 놓으면 한때 덕성에 게으름이 있다. 책을 읽으면 이 마음이 늘 있고, 책을 읽지 않으면 끝내 의리를 보지 못한다.
75. 책은 모름지기 외워야 한다. 정밀한 생각은 흔히 한밤중이나 혹 정좌(靜坐)할 때 얻는다. 기억하지 못하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큰 근원을 관통한 뒤에는 책도 쉽게 기억된다. 그러므로 책을 보는 자는 자기 의심을 풀고 자기가 통달하지 못한 것을 밝힌다. 매양 볼 때마다 새 유익함을 알면 곧 배움이 나아간다. 의심하지 않을 곳에 의심이 있어야 비로소 나아감이다.
76. 《육경》은 모름지기 순환하여 이회해야 한다. 의리는 다함이 없으니, 자기가 한 격(格) 자라기를 기다리면 또 달리 보인다.
77. 《중용》 글 같은 것은 곧장 구절마다 이회하여 그 말이 서로 발명(發明)하게 해야 한다.
78. 《춘추》라는 책은 옛날에 없던 것으로 곧 중니가 스스로 지었다. 오직 맹자만이 알 수 있었다. 이치가 밝고 의가 정밀하지 않으면 거의 배울 수 없다. 앞선 유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다스렸으므로 그 설이 천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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